01. 그럼 시작할까요

“안아.”

그녀는 나를 그렇게 불렀다.

“안아, 안 자?”

“벌써 여섯시인걸요. 아침이에요.”

얇은 베일처럼 겹겹이 깔린 어슴푸레한 새벽의 어둠이 가볍게 흔들렸다. 거의 걷혀가는 새벽의 자취가 이 공간의 지배자에게 보일 수 있는 유일한 경외의 표시였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정작 경배를 받은 그녀 본인이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섯시? 우, 그럼 한참 꿈나라에서 헤엄치고 있을 시간이잖아.”

그녀는 잠에 취해 비틀거리며 나를 향해 다가왔다. 한손으로는 늘 그녀의 침대에 뒹굴고 있는 강아지 인형을 끌어안고 나머지 한손으로는 눈을 가리고 있는 상태였다. 정오가 되어도 한밤중처럼 캄캄한 그녀의 방에 비하면 이미 하루가 시작된 이 곳, 거실은 눈이 부신 것이 당연했다. 나는 읽던 책을 내려두고 일어나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럼 다시 방으로 가요. 좀 더 자고 이따가 일어나세요.”

“우우.”

그녀는 투정부리듯 고개를 흔들었지만 달래면서 한 발짝 내딛자 눈앞의 풍경이 바뀌어 있었다. 방금 전까지는 환하게 빛이 들어오던 거실이었는데 지금은 어둑한 복도에 자리한 그녀의 방문 앞이었다. 집안의 다른 이들에겐 열리지 않는 비밀의 문 정도로 알려져 있는 방이지만 사실은 그녀의 침실. 그것도 지금같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을 때는 물론 그녀가 본체로 돌아갔을 때도 편히 쉴 수 있도록 준비해둔 특별한 장소였다. 문이 열리자 바깥과는 완전히 다른 공간인 듯 끝이 보이지 않는 아득한 어둠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 깜깜하네요.”

“졸려-.”

나는 바로 방의 윤곽도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워서 방이 아니라 문 너머로 구멍이 뚫린 듯한 그곳에 차마 발을 들이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거리낌 없이 자연스럽게 문턱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고, 그녀가 내 손목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나 역시 따라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방안은 말 그대로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태. 문에서부터 그녀의 침대까지 이르는 긴 직선상에 부딪칠만한 물건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녀는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가면서도 내 손을 놓지 않았다.

“저 이만 가볼게요.”

“싫어, 옆에 있어.”

거의 잠에 빠져든 상태인 듯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내 손을 더욱 끌어당겨 아예 인형과 함께 품에 안았다. 난 완전히 침대위에 걸터앉게 되어버렸다. 놓아달라는 의미로 그녀의 손을 톡톡 두드려보았지만 그녀는 모르는 척 새근새근 고른 숨소리를 내었다.

“자는 척이라니, 어린애처럼 굴지 마세요, 마스터.”

조용히 불러 보아도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괜히 웃음이 나왔다. 아무것도 보이질 않아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머리를 찾아 침대를 더듬었다. 그녀가 자면서 신경 쓰이지 않도록 얼굴을 덮은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그녀의 이마를 쓸어 넘기는데 갑자기 강한 힘으로 손을 붙들고 있던 팔이 느슨해졌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끝까지 소매에서 떨어지지 않는 손을 조심스레 잡아 그녀의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이따가 낮에 일어나면 다시 손 잡아드릴게요. 그러니까 지금은 참으세요.”

당연히 대답은 없었다. 나는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를 남기고 방을 나왔다. 언제나 그랬지만 이 방은 빠져나갈 때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은은한 빛이 나갈 길을 비추어 주었다. 마치 어느 누구의 접근도 반갑지 않다는 듯 들어오는 이에겐 인색하고 나가는 이에겐 후한 방이었다.


시안이 나가고 문이 닫히자 방안의 풍경이 바뀌었다. 문과 문턱이 맞닿고 ‘잘각’하는 소리로 바깥 공간과 완전히 격리되었음을 깨달은 방이 자신의 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갑자기 방의 크기가 변하거나 벽지, 가구가 바뀌는 등의 큰 변동은 아니다. 방안에서 변한 것은 단 한 가지. 갑자기 나타난 것인지 단순히 커튼에 가려 있었는데 너무 어두워서 눈치 채지 못한 것인지 모를 작은 창문이 나타났을 뿐이었다. 창밖의 풍경은 집안의 다른 장소와는 다르게 한밤중이었다. 어두운 푸른 하늘에 달과 별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맑고 깨끗한 빛이 창문을 통해 들어와 갖가지 잡동사니로 가득한 수납장을 비추었다. 무대 위로 스포트라이트가 떨어지듯 곧은 직선을 그리며 들어온 달빛이 가장 환하게 빛나는 방의 구석에 ‘그녀’또래로 보이는 한 소녀가 서있었다.

소녀는 달빛을 받아 붉고 시리게 빛났다. 붉었다. 소녀의 선명한 선홍색 머리카락은 귀를 덮고 좁고 가녀린 어깨를 만나 갈라졌지만 남은 머리숱만으로도 풍성해 어깨마저 덮고 빈약한 가슴과 등을 타고 흘러내려 통통한 엉덩이와 허벅지, 종아리를 지나 마침내는 바닥에 흩어져버렸다. 어둠 속에서 보아도 눈이 아플 만큼 자극적인 붉은색이 달빛을 받아 소녀의 전신을 감싸고 반짝였다. 가만히 달을 응시하는 그녀의 동그란 두 눈, 그것을 감싼 풍성한 속눈썹과 눈 위의 곧고 짙은 눈썹도 같은 빛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밀랍인형 만큼이나 창백한 그녀의 피부 위에도 머리카락만큼이나 붉은 곳이 있었다. 화장기라곤 전혀 없는 소녀의 양 뺨은 한눈에 띌 만큼 발그스름했고 앙다문 입술은 립스틱을 바른 아가씨의 입술보다도 붉었다. 붉은 빛에 가려져 거의 보이지 않는 여린 몸뚱아리엔 소녀의 피부만큼이나 하얀 민소매 원피스 한 장만이 걸쳐져 있었다. 그것은 마치 소녀의 붉음이 더욱 붉어 보이도록 배경으로 깔아놓은 흰 도화지 같았다.

건조한 무표정과 미세한 움직임조차 없는 모습은 소녀를 살아 있는 생물이 아닌 것처럼 느끼게 했다. 얼핏 보기엔 숨도 쉬지 않는 것 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느린 박자로 가슴이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댕-. 댕-. 댕-.”

창 너머 먼 곳에서 출처를 알 수 없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댕-. 댕-. 댕-.”

느릿하게 퍼지는 종소리의 여운은 이미 깊은 잠에 빠진 아이에게 이불을 덮어주듯 방안을 포근하게 감싸주었다.

“댕-. 댕-. 댕-.”

종소리 사이로 뭔가 다른 소리가 들렸다.

‘일어나’

숨소리 같은 속삭임.

“댕-. 댕-. 댕-.”

“지금이야.”

마지막 종이 울리자마자 들린 것은 조금 전의 환청 같은 소리와는 달랐다. 들릴락 말락 작게 속삭이는 것은 같았지만 분명 방안에서 들려온 것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시작했다.”

붉은 빛의 소녀였다. 소녀의 작은 입술이 달싹였다.

“계속 자고 있을 건가.”

“움…….”

그녀가 몸을 뒤척이더니 옆으로 돌아누웠다. 소녀에게 등을 보이는 방향이었다. 그녀는 뭔가 불편한 듯 얼굴을 찌푸린 체 강아지 인형을 꼭 껴안았다.

“그렇군.”


소녀는 사라졌다. 처음 나타나서 내내 그림같이 한자리에 서 있던 소녀는 말을 끝내자 아무런 낌새도 없이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방안의 풍경은 붉고 커다란 점이 사라졌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바뀐 것이 없었다. 어느 샌가 창에는 속이 비치는 얇은 커튼이 쳐져 있었다. 그녀는 조금 더 어두워진 방안이 마음에 들었는지 행복한 미소를 띠고 편안히 잠들어 있었다.

#결계안에서는 #임중백가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