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대 학우의 자살 사건’ 너머

오늘 독서모임에서 무한경쟁사회 이야기를 했다. 그중에서도 <현시창>이라는 책을 위주로 얘기했는데, 카이스트 자살 사건이 한창 가시화되었을 때의 글을 읽고, 각자의 경험을 풀어놓는 시간이 있었다.

요즘에는 대학에서 자살 사건이 일어나도 크게 소란이 일지 않는 느낌이다. 내가 아는 교내 자살 사건만 해도 여럿 있는데 모두 묻혔다. 성적 때문에 장학금을 잘렸다 말하면 돌아오는 것은 비난 뿐이다. 나는 성적 장학금 때문에 휴학한 경험이 있다. 다들 무한경쟁사회에 익숙해져 가는 건가. 씁쓸하다.

무한경쟁사회는 결국 좋은 직장, 안정적인 직장을 구해야 하는 현실과 맞물리는 것만 같다. 조금만 경쟁에서 다른 궤도를 타도 바로 쓸데없는 경력 취급이니까. 그런 점이 슬펐던 것 같다. 아마 중학교 때 이런 이야기를 봤으면 좋은 학교 얘기를 했을 거다. 영원히 경쟁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야기를 다 나누고 보니, 왜 하필 ‘카이스트’였을까 싶다. 왜 카이스트에서 무한경쟁사회의 가시화가 시작되었을까. 명문대 사람들도 경쟁에 억눌려 지낸다는 사실에 어째서 사람들은 놀랄까. 추측하기로는 무한경쟁사회에서 ‘승리’한 사람들도 무한경쟁사회의 피해자라는 사실에 놀라는 게 아닐까 싶다.

명문대에서의 사회문제와 투쟁이 먼저 가시화되는 것은 확실히 씁쓸한 문제이다. 분명 경쟁사회에서 승리했다고 여겨지는 자들의 투쟁이기 때문에 조명하는 면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투쟁은 가짜가 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어떠한 사람도 무한경쟁사회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이와 떼놓지 못하는 담론이 하나 있다. SNS에서 대치키즈 플로우가 돈 적이 있다. 대치키즈들이 피해자성을 주장할때의 논점이 '무한경쟁사회'에 있는데도 계속해 ‘상위 계급’이라는 이유로 피해자성을 주장할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계급사회는 계급사회대로 규탄할 수 있고 무한경쟁사회는 그것대로 규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계급 비판과 신자유주의 비판을 동시에 할 수 있다. 대치키즈들이 특혜를 받았다는 것과 동시에 경쟁사회의 피해자임을 인정해야 한다. 동시에 다양한 사람들의 경쟁사회에 대해서도 들어봐야 한다. 마이크를 조금 더 넓게 쥐어주어야 한다. 장기적으로는 ‘명문대 학우의 자살 사건’이 아니라, ‘다양한 청년들이 느끼는 무한경쟁사회의 문제점’을 파헤쳐야 한다.

독서모임에서 다른 이야기를 훨씬 많이 했던 것 같은데, 느낀 점이 조금 다른 포인트인 것 같다. 혹시 얘기를 충분히 듣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있다. 다음번에는 독서모임에서도 메모하면서 이야기를 들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