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이 기억하는 사람

앞으로 걷다 보면 세상의 끝이 있대. 곰은 다 해진 가방을 다시 한번 움켜쥐었다. 가방에 달린 플라스틱 키링이 흔들렸다. 곰은 한쪽 눈이 단추 눈으로 바뀌어 있고, 찢긴 허리 쪽 구멍 사이로 솜이 삐죽 나온 인형이다. 한쪽 귀에는 초록색 얼룩이 있는데, 곰은 그 자국을 소중히 여겼다. 여기에서는 누가 바라보지도 않으니까. 주변에는 인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나무가 울창하게 솟아 있었다. 나뭇가지에는 투명한 고치들이 빼곡하게 매달려 있다. 어떤 고치에서는 조용한 자장가 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다른 고치에서는 떠들썩하게 뛰어노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곰은 그만 귀를 틀어막고 싶어졌다. 어쨌든 거기에는 보미가 없을 테니까.

“죽은 사람은 세상의 끝에서 만날 수 있대.” 언젠가 만난 토끼가 말했다. 곰은 보미를 떠올렸다. 곰을 처음 만나고 밋밋하다며 물감통에 귀를 푹 담가버린 보미. 체육대회에 깍두기로 앉아있으면서도 곰을 무릎 위에 올려두었던 보미. 이제는 어른이 되고 싶다고, 곰 같은 건 필요 없다고 말하는 보미. 그런데도 죽기 직전까지 자신을 침대 머리맡에 올려두었던 보미. “동쪽으로 계속 걸어 나가면 세상의 끝을 볼 수 있대. 세상은 평평하니까.” 아무도 가지 않는 동쪽 길을 따라가. 토끼가 거듭 말했다. 토끼는 곰보다 털이 희지만, 알고 있는 건 훨씬 많았다. 그 모습에 홀려 곰은 토끼에게 질문했다. 우리는 왜 헤어지게 된 건지. “나와 보미는 영혼의 단짝이야. 어릴 때부터 보미와 함께였고, 보미가 중학생이 되고 나서도 걔를 봐왔어. 죽을 때도 함께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토끼는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걔한테 네가 소중하지 않았나 보지.” 아니면 네가 들어가기에 유골함이 너무 좁았다거나. 토끼가 덧붙였다. 그 토끼는 세상의 끝으로 먼저 떠났다. 동쪽으로, 무조건 동쪽으로.

세상의 끝으로 가는 길에는 표지판이 없다. 그러나 세상의 끝과 얼마나 가까운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일출을 볼 때마다 태양이 점점 커졌다. 곰은 동쪽에서 떠오르는 태양에 접근하고 있었다. 갈수록 고치의 수는 줄어들고 나무 또한 듬성듬성 심겨 있었다. 점점 날이 뜨거워지고 있었고, 바닥 길이 울퉁불퉁해졌다. 곰은 햇살을 받아 따뜻해진 고치에 가까이 갔다. 고치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문득 곰은 자신이 고치에서 깨어난 그날을 떠올린다. 보미의 침대 위라고 생각했는데 푹신한 고치 껍질 위였다. 주변은 서늘하다시피 고요한 숲속이었다. 그제야 곰은 보미가 이제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의고사를 보겠다고 했는데 성적표를 들고 오지 않았다. 문득 보미가 울고 있을 때 더 힘차게 안아줄 걸 싶었다. 곰은 눈물을 흘릴 수 없었지만 우는 것처럼 눈을 비빌 수는 있었다. 만일 내가 깊은 잠에 빠졌다면 어땠을까. 보미를 기억해 줄 어릴 적 친구는 존재하지 않게 되는 건가. 곰은 보미의 어릴 적 친구를 떠올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유치원 친구 정도밖에 기억나지 않았다. 지민, 현지, 서희, 이제는 보미의 존재를 잊어버릴 만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람이니까. 쉽게 잊는 인간이니까. 곰은 소리가 나지 않는 고치를 지나쳤다.

어느덧 숲이 끝나고, 모래사장이었다. 수평선의 끝이 보였다. 곰은 힘차게 달려가려다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만다. 너무 오랫동안 걸었기 때문이다. 곰은 자신의 짐을 내려놓고 한 걸음씩 세상의 끝을 향해 발을 옮기기 시작한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수평선의 끝에 도달하자 곰은 깨닫는다. 세상의 끝 그 이상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마치 투명한 벽이 쳐진 것처럼, 세상의 끝 너머로 갈 수가 없었다. 토끼도 이런 건 말해주지 않았잖아. 억울했다. 정말로 억울했다. 곰은 한참 동안 내지 않았던 목소리를 내었다. – 보미야, 어딨어. 반응이 없자 더욱 크게 외친다. – 보미야, 돌아와. 보미야.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목소리가 울리지 않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곰은 처절하게 소리친다. – 보미야, 죽지 마. 보고 싶어. 나랑 술래잡기하자. 보미야.  같이 놀자. 모래성 쌓고 싶어.   물감으로 장난치고 싶어. 내 귀 보이지? 나 아직도 귀가 초록색이야.   다 듣고 있지?   그러니까 이제 돌아와…. 곰은 목소리가 갈라질 때쯤 지쳐 쓰러진다. 모래사장에 초록 귀를 한 곰 인형이 남아 있다. 바람이 밀려오고, 곰 인형은 천천히 모래에 묻히게 된다. 서서히, 아주 서서히.

곰은 깨어난다. 작은 꼬마애가 눈을 반짝이며 곰을 들고 있다. “네 이름은 이제부터 곰이야!” 곰은 꼬마애를 바라본다. 꼬마애는 갸웃거리다가 곰을 카트에 태운다. 그리고 이어지는 자기소개. “내 이름은 미영! 너는 곰!” 분명 누군가를 애타게 찾고 있었는데, 곰은 생각한다. 분명 누군가에게 돌아와달라고 외쳤던 기억이 나는데, 정작 누구인지가 생각이 나지 않았다. 혹시 내 앞에 있는 꼬마애가 그 사람일까? 고민하던 찰나 꼬마애가 곰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곰, 이제부터 우리는 친구야!” 곰의 왼쪽 귀에 뭔가 차가운 것이 닿는다. 살펴보니 초록색 클레이가 귀에 묻어 있다. 그제야 곰의 기억이 하나 돌아온다. 내가 찾는 사람은, 왼쪽 귀를 초록색으로 물들이는 사람. 곰은 찾던 사람이 미영이일 수도 있겠다고, 하나의 가능성에 마음을 기울인다. 그래, 나는 미영이를 찾고 있었던 거야. 내가 알던 느낌과는 조금 다르지만…. “앞으로 잘 부탁해!” 미영이는 곰의 손을 잡고 흔든다. 곰은 미영에게 마음속으로 손을 내민다. 잘 부탁해, 미영. 너의 어릴 적 친구가 되어줄게.

2025.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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