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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어느 퀴퍼에서 생긴 일

주의: 기독교(개신교) 비판적입니다.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등장인물이 있습니다.


하경은 실내에서 나오자마자 눈을 찡그렸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아래 수많은 사람들이 도로를 메우고 있었다. 경찰 버스가 도로가에 서 있었다. 하경이 바라보는 쪽에도, 그 반대편에도. 시끄러운 북소리와 와글거리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머리에 가득 찼다. 하경은 잠시 멈칫하더니, 그중 한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

어느 지하실. 불이 꺼져있어 벽에 붙어 있는 십자가는 보이지 않는다. 월요일이라 그런지 위층도 조용하다. 교회 의자가 양쪽으로 길게 깔려 있고, 맨 끝쪽에 작은 탁자가 있다. 거기에 한 사람이 팔짱을 끼고 앉아 있다.

청년부 하경은 그 안으로 조심스럽게 발을 들인다. 바지 주머니에는 새신자 접수증 뭉텅이가 들어 있다. 아직 작성되지 않은 새것이다. 길거리에서 혹여나 새 가족을 만날까 갖고 있던 것이다. 물티슈와 전단지도 함께 들어있다.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동성애 조장하는 차별금지법 반대한다’. 날씨가 슬슬 더워지지만 하경은 정장에 구두를 입는 것을 잊지 않았다.

텅 빈 지하실에 발소리가 울렸다. 하경은 탁자에 가까이 다가가, 남자의 반대편에 앉는다.

“저, 목사님. 오늘은 무얼 위해 불렀죠?”

“그게 말이다.”

평소와는 다른, 낮고 짙게 깔린 목소리였다. 목사는 한숨을 쉬며 안경을 벗었다. 순간 목사의 몸이 반짝 하고 빛나더니 다시 사그라들었다. 목사는 몸을 부르르 떨더니 말했다.

“아오, 이거 쉽지 않네. 빙의 당해주는 것도 어렵구먼.”

“빙의라고요? 그런 게 성경에 나오던가요?”

목사가 안경을 하경에게 건네주었다. 하경은 안경을 요리조리 살펴보기도 하고, 한번 써보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 변화도 없었다. 그 사이 목사는 설명을 이어갔다.

“물론 나오지. 다만, 악한 영이 아니라 선한 영에도 빙의될 수 있다는 것. 그걸 내가 발견했어.”

“그렇지만, 그런 게 과학적으로 가능해요?”

“과학을 전부 믿는 거니?”

날카로운 목사의 질문에 하경은 입을 다물었다. 아마 진화론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겠지.

“그렇군요. 그런데 선한 영에 빙의해서 뭐하게요?”

“간단해. 복음을 전파하면 되는 거야.”

목사는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이 안경의 이름이 뭔지 아니? 베드로. 예수님의 성실한 신자였지.”

“아, 그 세 번 예수님을 부인했다던….”

“그래. 그 경험은 베드로밖에 한 적 없어. 나도 베드로가 그때 무슨 감정을 느꼈을지 예측할 수 없지. 하지만 이 안경을 쓰면, 베드로의 마음을 알 수 있어. 더불어 그때의 경험도 생생하게 전해져오지. 그러면 무엇이 가능할까?”

“어…. 그러게요.”

“생생하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가능해.”

목사는 안경을 고이 접어 안경집에 집어넣었다. 하경은 목사를 경외스럽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나는 설교를 하기 직전에 안경을 낀다. 그러면 은혜가 내려와.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주신 그 은혜. 덕분에 나는 영광스럽게 설교를 하고, 신자 여러분들에게도 은혜를 전해줄 수 있어.”

“그렇군요….”

하경은 활짝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부러움을 담고 있다는 것을 목사는 알고 있었다. 목사는 기다리는 질문이 있다는 듯이 먼저 하경에게 물었다.

“그럼 하경, 너는 바라는 게 있니?”

“뭐가요?”

“‘빙의’라는 현상을 알아버렸잖아.”

“아, 어, 음….”

하경은 망설이는 척 하다가 속에 담아둔 말로 대답했다.

“저도 베드로에게 빙의될 수 있나요?

“좋은 질문이야. 베드로는 이미 나와 연을 맺었어. 그러니 너에게 빙의되지 못하지. 역시 나도 다른 사람에게 빙의되지 못해.”

하경은 앞에 목사가 있다는 사실까지 잊어버리고 푹 실망했다. 목사는 어깨가 축 처진 하경에게 말했다.

“아, 아쉬워할 필요 없어. 내가 아주 특별한 빙의기술을 만들어냈거든.”

“뭐죠?”

화색이 된 하경에게 목사는 속삭였다.

“예수에게 빙의되고 싶지 않니?”

“네?”

별안간 목사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하경에게 말했다.

“대신 너에게 아주 특별한 임무를 주마.”

-

예진은 연필꽂이에 꽂혀 있던 깃발을 뽑아들었다. 여섯 색깔의 무지개로 된 손바닥만 한 깃발이었다. 예진은 깃발을 위로 휘둘러도 보고, 모자에 꽂아보기도 했다. 최대한 화려한 옷으로 차려입고 싶었는데, 옷장에는 검은색 옷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검은색 옷을 입은 채로 예진은 나갈 준비를 마쳤다.

오늘의 최대 고민은 이거였다. 전 여자친구를 마주치면 어떡하지. 그 애도 소수자 인권에 상당히 관심이 많았다. 어쩌면 예진과 헤어지고 몰래 조직위원회에 들어가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혹은 모든 걸 부정하고 싶을지도 모르지만.

더 문제는, 예진은 내심 재결합을 꿈꾸고 있다는 것이었다. 머릿속은 온통 ‘다시 만나고 싶다’라는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다.

어쩔 수 없지, 시작부터 끝까지 집회 장소에 있는 수밖에.

그러려면 당당히 예비를 해야 했다. 예진은 500ml짜리 생수병을 세 개 가방에 넣었다가, 무거울 것 같다는 생각에 하나 뺐다. 그런데도 가방은 여전히 무거웠다. 아무래도 보조배터리 때문인 것 같았다. 이 휴일에, 이 날씨에 지하철에 탔다가는 집회 장소까지 가기도 전에 지칠 것 같았다.

그래, 오늘은 몇 없는 축제 날이니까. 일단 이대로 가보자.

막상 예진이 집회 장소에 도착하니 사람이 너무 많았다. 건너편에서 북을 치는 사람들도, 본 행사장에 있는 사람들도. 지방 집회와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여기에서 전 여자친구를 찾기에는 불가능에 가까운 것 같았다.

에이, 그냥 꿈이었던 거야. 잊어버려!

예진은 본인이 한 줄기 희망을 잡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기로 결정했다. 시작 부스부터 시작해서 한 곳 한 곳씩 둘러보았다. 스티커를 나눔받고, 뱃지를 샀다. 포스트잇에 미래의 꿈을 적고 폴라로이드 사진을 혼자 찍었다.

그래, 혼자서도 즐길 수 있어. 예진은 애써 떨쳐버리려 노력했다.

문득 어떤 사람이 예진의 팔을 잡았다.

“저, 저기요.”

목소리가 닮았어. 예진은 떨리는 마음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저기 교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 같은데요.”

10대로 보이는, 교복을 입은 학생이었다. 전 여자친구가 아니었다. 예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몰라요.”

“아니, 그게 아니라 교회 건물이 한번 크게 일렁였어요. 그리고….”

그 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종소리가 들렸다. 그것도 세게, 아홉 번. 그 리듬은 다음과 같았다.

· · · – – – · · ·

“주변에 도움을 청했나 봐요. 곧 혐오세력들이 몰려오지 않을까요?”

순식간에 장내가 혼란스러워졌다. 예진은 이 애가 떨고 있는 걸 못 본 체할 수 없었다.

“일단 지하철역으로 갑시다.”

예진과 그 학생은 인파 속에서 틈을 찾아 서둘러 을지로입구역으로 질주했다.

-

목사는 안경을 벗었다. 이제 곧 큰 파도가 올 것이다.

평범한 사람인 척 하고 인파에 섞여 있는 목사는 하경이 교회 건물에서 나오기를 기다렸다. 베드로에 빙의했을 때 그는 신도들이 감화된 것을 보았다. 예수가 빙의된 하경이라면, 그렇다면 저 동성애자 녀석들을 한번에 치유할 수 있을 것이다.

종이 뎅뎅 울리고, 천을 목에 감싸고 무전기를 든 하경이 드디어 교회 건물에서 나왔다. 신성한 천이 아니라 수건처럼 보인다는 점이 흠이었다. 조금 더 제대로 묶어줄걸. 목사는 하경이 동성애 시위대로 오해받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그런 걱정은 할 필요 없었던 것 같았다. 하경이 가는 길마다 사람들이 비켜주었다. 흡사 모세의 기적 같았다. 교회에서 동원된 사람들은 하경을 알아보고 전부 비켜주었다. 반면 무지개를 입은 녀석들은, 하경이 뭐라 말하자 다들 비켜주었다. 목사는 마음속으로 ‘하경이 불쌍한 저것들을 치유했다’로 받아들였다.

하경이 그렇게 횡단보도를 건너고 집회장으로 나아갔을 때, 누군가가 인파 속에서 튀어나와 하경을 쳤다.

목사는 하경의 근처로 살금살금 숨어들어갔다. 잘 보니 어린애 한명은 도망갔고, 하경과 시커먼 여자애 한 명만 남아있었다.

가까워지자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혹시 김하경 씨 맞나요?”

잠깐만, 저 여자애가 어떻게 김하경을 알아? 목사의 눈이 찌푸려졌다. 하경은 피하지 않고 예진을 응시했다.

“예진아.”

“하경아, 어, 음…. 그러니까,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다. 그치?”

“나 이제 교회 다녀.”

잘한다! 목사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알던 사람이라고 봐주는 것 없이 전부 쓸어버리는구먼.

“아, 어. 그렇구나.”

“비켜.”

“응?”

“비키라고.”

하경은 숨을 들이쉬고는 말을 이어갔다.

“만나는 여자 있어.”

목사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하경이 만나는 여자가 있다고? 하경이가 사실, 설마 정말 그 동성애자였다고? 목사는 눈을 찌푸리며 안경을 다시 썼다.

“미안.”

그리고 하경은 자리에서 벗어나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목사의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듯했다. 충격을 견디며 목사는 홀로 남은 예진에게 다가갔다.

예진은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잊어버린 채로 멍했다. 누군가가 말을 걸었지만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하경이 남자…. 아니, 여자친구에요?”

“전… 이요.”

“그럴 리 없잖아요.”

목사는 헛웃음을 지었다. 예진의 코가 찡그려지기 시작했다.

“제 전 여친 맞아요.”

“무슨 소리세요. 하경이가 그럴 리 없잖아요.”

“제 전 여친 맞다니까요? 혹시 전 애인이라도 되세요? 아니면 혐오세력이세요?”

“혐오세력 아닙니다!”

목사는 크게 외쳤다. 순간 주변의 사람들이 목사 쪽으로 돌아보았다. 목사는 음절 하나하나를 곱씹듯이 말했다.

“혐오세력 아니고, 하경이는 동성애자 아니라고요.”

그때, 목사의 무전기가 지지직 소리를 냈다. 무전기를 오른손으로 천천히 들어 버튼을 눌렀다.

“여기는 윤노엘 목사입니다.”

“세 번 부인할 거라고 했죠?”

순간 공기가 멈췄다. 목사는 말을 하려 했지만 입술이 움직이지 않았다. 하경의 그 음성은 ‘베드로’가 듣기에 무척이나 ‘예수’였기 때문이다. 영광스럽고 성스러운, 그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그런 음성이었기 때문이다.

예진은 주변 시민에게 경찰을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경찰이 오자 예진은 그제야 눈물을 글썽이며 자리를 피했다. 그 와중에도 목사는 다리만 덜덜 떨 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

하경이는 결국 교회에서 쫒겨났다.

퀴어축제에서 아무런 방해도 하지 못했고, 빙의가 해제된 후에는 이렇게 주장했다.

“예수님은 아무도 해치지 않기를 바랐어요. 그래서 아무도 방해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저 또한 동성애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저를 용서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셨습니다. 그냥 그런 거라고 말씀하셨거든요.”

목사들은 그 말을 듣자마자 하나같이 격분했고, 하경이는 새신자 접수증을 바닥에 집어던지고 교회를 제 발로 나갔다. 덕분에 하경이는 목사들의 회식 때마다 안주거리가 되고는 했다.

예수 빙의를 위한 천은 무지개색으로 덧칠되어 있었다. 목사들은 그걸 흔적도 없이 태워버렸다. 문제의 목사는 베드로 안경이 주머니에 잘 있는지 확인했다. 안경은 잘 있었고, 모든 게 완벽했다.

그런데 자꾸 마음 어딘가가 걸렸다.

텅 빈 지하실, 목사는 안경을 썼다. 그리고 가슴 속으로 동성애에 대해 생각했다.

동성, 나와 동성인 사람과 손을 맞추고, 서로 안고, 입술을 맞대고….

왜 연상이 자연스럽게 되는 걸까.

그때, 베드로의 목소리가 뇌 속에서 들려왔다. 목사는 움찔했지만, 결국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얼은 디나이얼이라더니 진짜네?”

# #소설

// 끄적끄적 by 예은

윤 대통령 탄핵 후의 5.18을 20일 가량 앞두고

민주주의를 날로 먹었다. 시위에 매주 나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뉴스에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사책을 고루하다며 펼쳐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치 얘기를 농담거리로 치부했기 때문이다. 투표일까지 후보의 공약을 하나도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을 내 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상계엄 당시 우리는 전체학생대표자회의 회의실에 있었다. 학부 총학생회 자치기구들의 예결산안 의결을 하고 있을 때 느닷없이 메신저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윤석열이 계엄했대. 전쟁 난 건 아니지? 큰일이 났다는 사실을 의장이 어렴풋하게 파악했는지, 곧바로 10분간의 정회가 이어졌다.

장난스럽게 반응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중앙비대위장 이름]도 계엄 안 하나? 내 친구는 짓궂은 반응들에 화를 냈다. 이건 정말로 큰일이라고, 우리 다 죽을 수도 있다고. 웃고 떠들 때가 아니라고. 동아리 톡방도 시끄러웠다. 가짜 뉴스와 윤석열의 담화 링크가 톡방을 떠돌아다녔다.

정회가 끝나자 회의는 이어졌고, 다행히 전학대회는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산회 후 중앙비대위장은 중앙운영위원들을 불러서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상황 봤겠지만, 내일 소집 소요가 있을 수도 있다. 현 상황을 트래킹하고 있겠다.

계엄이 해제된 것은 당시 전학대회에서 '정치'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던 우리에게는 정말 천만다행이었다.

그다음부터는 모든 학우가 아는 대로다. 계엄은 해제되었고, 대학가에서 시국선언 바람이 불어 우리 학교도 시국선언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중앙운영위원회에서의 토론 끝에 규탄문을 쓰는 방향으로 의결이 되었다. 나를 포함한 중앙운영위원들은 비상계엄에 대한 규탄문을 작성했다. 아마 다들 처음 써본 규탄문이지 싶다. 그러고서는 학생총회가 열리고, 시국선언이 가결되어 진행했다.

당시는 나에게 자아분열의 시간이었다. 인간으로서의 나는 간절하게 시국선언을 원했다. 반면 자치기구장으로서의 나는 의견을 대표할 책임이 있었다. 과 대표들끼리의 의견이 갈리는 상황이었고, 나는 중앙운영위원회에서 소극적인 스탠스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그때의 행동이 학생자치적으로만 봤을 때 잘못된 것은 아니다. 모두의 의견을 수렴하는 것은 자치기구장으로서의 책임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저 학생사회가 어쩌다 이렇게 '탈정치'를 빙자한 '중립 아닌 중립'을 추구하게 되었는지, 그것이 고민스러울 뿐이다. 그리고 내가 왜 그들을 설득하려 하지 않았는지도.

그러나 나의 태도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관점으로써는 크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학생총회에서 시국선언이 가결되자마자 교내 시국선언과 대학 연합 시국선언에 학우 개인으로서 적극적으로 참석하였다. 하지만 그것이 죄책감을 덜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것은 여전히 부끄럽다.

전남대학교에 가면 벽에 사람들의 이름이 가득 쓰여 있다고 한다. 죽은 사람들의 이름 아래에는 사망 사유가 있다고 한다. 기숙사에서 사망한 채 발견. 행방불명. 전남도청 앞 발포로 사망. 민주화를 위해 희생하신 전남대학교 열사분들을 기리기 위한 벽이라고 한다.

며칠 전에는 <소년이 온다>를 읽어보았다. 뻔한 감상밖에 떠올리지 못하는 내가 원망스러웠다. 특히 '이번 비상계엄이 해제되어서 운이 좋았다'라는, 죽음과 억압을 겪은 사람들로부터 안전한 거리에 서 있는듯한 나 자신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누군가의 죽음을 배경 삼아 나의 행운을 확인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모든 죽음을 목도하며, 그동안 나는 민주주의를 누리기만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각해 보면 비상계엄 이전까지 나는 정치에 관심이 없다시피 했다. 투표일마다 관성적으로 1번을 눌렀다. 정치 뉴스가 지루하다고 생각했고, 가끔은 농담거리로 삼았다. 학생사회에서 일하며 운동권을 지망하기도 했지만, 정작 운동권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다. 여전히 역사책을 펼쳐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학생사회에서 일하면서 비상계엄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더라. 대학 본부가 무섭다며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학생 대표를 설득해 볼 생각 없이 기권을 눌렀었다. 매일 밤을 새우며 뉴스를 확인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국가에서 일어나는 사건보다는 학생회의 문제를 더 심각하게 여겼다. 고백하자면 집회에 나가는 날보다 나가지 않는 날이 더 많았던 것 같다.

모든 것이 내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윤 대통령의 탄핵 소식을 듣고도 적당히만 기뻤나 보다.

이왕 민주주의를 날로 먹었으니, 적어도 유지하기 위해서 힘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는 민주적으로 운영되지 못하는 단체들이 많다. '내가 속한 공간만큼은'을 넘어서, 연대의 힘을 믿고 민주주의를 지키는 데에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요 며칠 다양한 투쟁 현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내가 알지 못한 투쟁들이 이렇게 많았다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최후의 수단임에도 그 수가 많은 고공농성, 구사대를 동원한 폭력이 가해진 시위, ‘불법 시위’로 공공기관에 프레이밍 당한 집회들. 그리고 내가 미처 몰랐기 때문에, 혹은 SNS에서 이슈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나열한 수많은 투쟁. 그 투쟁들에도 우리는 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광장은 나의 성장에 큰 역할을 해주었다고 생각한다. 케이팝 음악에 맞추어 응원봉을 흔드는 집회가 있었기에, 내가 이 세계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이제는 책임을 감당하는 사람으로, 언제나 어딘가의 광장에 서 있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더 이상 외면하지 않겠다고 오늘의 나로 선언해 본다.

# #에세이

// 끄적끄적 by 예은

겨울학기 문학팀에서 분명 <소년이 온다>를 읽었던 것 같은데, 나는 멘탈 핑계를 대고 빠져나갔었나. 아무튼 한강 작가님 책은 감정을 세게 건드리는 면이 있어서 미뤄두었었다. 사실 괜히 '유행 따라가는 사람' 될까 봐 조금 미뤄둔 것도 있었다.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다가 요새 자꾸 동아리방에 사둔 <소년이 온다> 두 권이 눈에 밟혔다. 왜 그런가 싶었는데 조만간 5.18 기행을 앞두고 있었다. 이제 정말 미룰 수 없었다. 그냥 부딪혀보자 하는 생각에 일단은 책을 펼쳐보았다.

제일 먼저 든 감상은 12월 3일의 비상계엄이 실패해서 다행이라는 것이었다. 그 생각이 너무나 부끄러웠는데, 5.18 당시의 열사분들을 보고 '나는 저렇게 되지 않아서 다행이다'라며 타자화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자세로 역사를 마주하고 있는가? 스스로에게 매일 질문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실화 기반 문학이라는 것은 논란에 빠지기 쉬운 장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소년이 온다>는 참상의 현장을 강하게 묘사했음에도 그 수위와 관련된 논란은 일절 없었다. 그 뜻은 실제 현장이 이것보다 훨씬 참혹했을 거라는 말 아닐까. 결국 우리는 책 한 권으로 그때의 참상을 완전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완전히 알 수 없어도 기억하는 자세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에 책에 묘사된 것 이외에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고, 그때의 정신을 깊이 새겨둬야겠다고 생각했다.

따져보면 나도 작가님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에 이 책을 펼쳐본 것이다. 유행 따라가는 것처럼 보여도 이 책을 모두가 한 번씩은 펼쳐주었으면 좋겠다. 정말 좋은 책이다.

# #리뷰

// 끄적끄적 by 예은

이상하게 ‘바디 포지티브’라는 단어를 들으면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뚱뚱해도 괜찮아”, “네 몸을 사랑해야 해” 같은 문장들이 떠돌아다녔죠. 그것이 바디 포지티브의 일차원적 해석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자기 몸을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 듯했어요.

사실 저도 제 몸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옷이 얇아지는 여름이 되면 더 그런 것 같아요. 작년에 샀던 바인더는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퀴어 쇼핑몰에서 새로 구매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누군가가 이런 저에게 “네 몸을 사랑해야 해”라고 말한다면 저는 아마 나쁜 말을 하겠죠. “너는 내 고민이 우습게 보이니?” 같은 말이요.

인터넷에서는 바디 포지티브가 자기 몸을 긍정하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지만, 원래 그 개념은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몸이 ‘정상’의 기준에서 벗어나더라도, 그 존재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자기긍정’이 꼭 자신의 무언가를 좋아하라는 말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두어도 된다, 혹은 나에게 걸맞게 바꾸어도 된다는 말이면 좋겠어요. 누구에게는 그것조차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제 몸을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저 조금 특이한 몸을 가진 사람일 뿐이죠. 그리고 트랜지션은 지금도 이미 나인 몸을 조금 더 편안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누군가가 제 몸을 함부로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런 세상이 온다면, 트랜스젠더들도 한층 살기 편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2025.04.25

# #에세이

// 끄적끄적 by 예은

12월 3일의 비상계엄 이후, 우리 학부 총학생회는 중앙운영위원회를 거쳐 비상학생총회를 소집했다. 나도 중운위원 중 한 명이었기 때문에, 비상학생총회의 스태프로 일하게 되었다. 그때 친구가 나에게 당부하던 말이 있었다. “학생들의 안전이 최우선이다. 대피로를 확보해두어라.” 물론 우리는 그렇게 했다. 다행스럽게도 비상학생총회에서 친구가 우려하던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무사히 총회가 개의되었고 공동 시국선언은 가결되었다.

생각해보면, 케이팝 음악에 맞추어 응원봉을 휘두를 수 있는 집회는 흔하지 않다. 나쁘지 않은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덕분에 사람들이 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니까. 대통령 탄핵 이후에도 사람들은 다양한 집회에 주목하게 되었다. 나는 내가 알지 못한 투쟁들이 이렇게 많았다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최후의 수단임에도 그 수가 많은 고공농성, 구사대를 동원한 폭력이 가해진 시위, ‘불법 시위’로 공공기관에 프레이밍 당한 집회들. 그리고 내가 미처 몰랐기 때문에, 혹은 SNS에서 이슈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나열한 수많은 투쟁.

<초혼, 다시 부르는 노래>는 투쟁에서의 결연함을 일깨워주는 영화이다. 우리는 왜 비상학생총회의 개회에서 안전을 최우선으로 두어야 했는가. 과거에 빗대어 보았을 때 공권력이 총회를 습격해올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왜 원내 공동 시국선언은 생중계되었는가. 역시나 같은 이유에서다. 투쟁에는 누군가의 목숨이 달려 있다. 여러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투쟁하지 않으면 누군가 죽을 수도 있다. 투쟁하고 저항하는 과정에서 누군가 죽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투쟁해야 하는가.

물론 모두가 투쟁의 의지를 갖고 발을 들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영화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주인공인 민영이 얼떨결에 노래패에게 가입하고, 폭력 진압되고 있는 집회에서 노래를 부르는 과정에서 ‘개연성’이 상당히 부족했다는 부분이었다. 비판할 지점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나는 이 개연성 부족이 의도되었다고 느꼈다. 투쟁을 시작하는 것은 사람 마음에 달렸다. 마음이란 예측 불가한 것이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이 별일 아닌 계기로 투쟁에 발을 들여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들은 많다. 현재의 ‘탈정치’ 총학생회들에 비교되는 학생운동 중심의 총학생회, 종교인의 올바른 마음가짐 같은 것들. 영화의 완성도에 대해 말하라면 노래로 모든 것을 바꾸는 전개가 아쉬웠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내 기준에서 그것들은 ‘투쟁의 결연함’이라는 주제에 비교하면 별거 아니었다. 영화를 보기를 잘했다. 많이 반성했다. 앞으로는 정말 진지한 마음가짐과 각오로 투쟁과 연대에 나서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2025.04.24

# #리뷰

// 끄적끄적 by 예은

단행본 제작 오픈콜: ‘나는 더 이상 정상이고 싶지 않아요.’

출판 프로젝트 공모안을 머릿속에서 쥐어짜고 있었다. 공모의 목적은 정상이라는 기준에 지쳐본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기 위한 것이었다. 한번 도전해보고 싶어서 빈 문서에 글을 썼다 지웠다 했다. 어떻게 하면 참신하게 정상성을 이탈할 수 있을까. 여러 가지 소수자성을 이야기로 엮는 방법이 있을까? 생각하다가 결국 끝에 다다랐다. 음, 나는 상대적으로 사회가 규정하는 정상에 부합하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어지간한 정상성 이탈로는 비비기 힘들겠다. 그만두자.

물론 이런 말들은 반농담이다. 내가 프로젝트에 지원하지 않은 이유는 따로 있다. 그 전에 다른 이야기를 먼저 해보자.

작년도 12월 3일 이후로 광장에 많은 사람이 섰다. 대통령 탄핵에 대한 이야기만 주야장천 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의제가 꺼내어졌다. 많은 사람이 본인이 성소수자이며, 정신질환자이며, 정상 가정에 속하지 않음을 외쳤다. 한참 그런 이야기들을 하다가 다시 대통령 탄핵 이야기로 되돌아가는 과정을 보며 온갖 생각이 들었다. 제일 신경 쓰였던 것은, 광장에 나올 수 있었던 이야기들과 나오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따로 있다는 점이다.

광장은 평등해 보였지만, 사실 누가 말할 수 있는지, 어떤 말이 환영받는지는 여전히 서열화되어 있었다. 용기를 내 말할 수 있는 소수자성이 있고, 낙인이 찍혔거나 접근성 차이로 꺼내지 못한 소수자성이 있다. 광장에서 성노동자에 대한 언급은 여성 차별에 대한 언급보다 훨씬 적었다. 내 지역에서는 장애인 분들이 발언하는 것을 쉽사리 보지 못했는데, 이는 집회에 대한 접근성 차이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집회에서 언급된 소수자성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이유이기도 하다.

내가 출판 프로젝트 공모안 준비를 포기한 이유도 이와 같다. 나는 반쯤 오픈리로 소수자성을 주변에 알리고 다닌다. 내가 소수자성을 알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당당하게 정신질환자이며, 성소수자이며, 한부모 가정임을 드러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만일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반복되어온 뻔한 이야기라면, 이런 말들은 이제 그만 해도 될 것 같았다. 대신, 다른 누군가가 알려지지 않은 소수자성, 낙인찍혀온 소수자성에 대한 목소리를 내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있다. 이것은 ‘카테고리’의 문제가 아니다. 교차적으로, 소수자인 나에 비해서도 더욱 ‘비정상’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소수자성은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계엄 이후의 광장을 통해 깨달았다. 탄핵 이후의 광장은 혼란스럽고 시끄럽기만 하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이미 광장의 가능성을 알고 있다. 지금의 ‘광장’이 언젠가는 어떠한 사람이든 품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출판 공모 링크: https://www.instagram.com/p/DILu7-_T9er/

# #에세이

// 끄적끄적 by 예은

집에 와보니 내가 죽어있었다. A가 결국에는 내 몸으로 사고를 친 모양이다. 나는 허겁지겁 영혼 보관소에 전화를 걸어 A를 찾았다. “A! 어떻게 나를 죽일 수가 있어!” “하지만 내 몸에서는 죽을 수 없었는걸!” 수화기 너머에서 뻔뻔하게 나서는 A가 한심했다. 후. 사람들은 나를 모두 A라고 생각하겠지. 그야 내가 지금 A의 몸 안에 있으니까. 불멸불사의 몸, 자가재생의 몸, 그 아무도 부러워하지 않는 몸에 말이다. “그래서 영혼 보관소는 편해? 죽어서 쉬니까 그렇게 좋아?” “응, 너무 좋아. 너도 얼른 죽어서 쉬자. 부활 순번 아직 많이 남았어.” 머릿속이 끓어오르는 나머지 킬킬대는 A를 두고 전화를 홧김에 끊어버렸다. 젠장. 어떻게든 A와 내 영혼을 다시 원래대로 바꿔놔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또 이런 일이 반복될 테니까.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2025.04.23

# #소설

// 끄적끄적 by 예은

저는 신념을 파는 사람이 아닙니다. 음모론을 퍼뜨릴 생각도 없었고요.

그의 기억을 판매한 것이 잘못인가요? 소비자들은 다양한 경험을 원하고, 그의 기억도 색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었을 뿐입니다. 저는 단순히 시장의 원칙을 따랐습니다. 그저 그의 경험을 가판대에 올려놓았을 뿐이에요. 그 이후의 일은 제 책임이 아닙니다.

질문을 바꾸시네요. 그가 얼마나 미쳐 있었냐고요? 미쳤다는 게 무엇인지에 따라 달라지겠죠. 하긴, 그때도 그는 충분히 미쳐 있었어요.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을 때 말이죠. 그래,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때 말입니다.

그가 처음 나무 문을 여는 방식도 특이했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들어오길래 저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물어봤죠. 기억 가게에도 자신을 감시하는CCTV가 있는지 궁금해서 그랬다고 하더군요. 저는 너털웃음을 지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전부 감시당하고 있고, 미세 권력에 따라 통제당하고 있다고 하니 그가 만족스럽게 웃더군요.

그는 살포시 흐리멍덩한 유리조각을 꺼내 저에게 건네주었어요. 그 자신으로부터 추출한 기억이었죠. 얼마에 팔 것이냐고 묻자 그는 공짜라고 했어요. 단 판매 수익의15퍼센트를 자신에게 달라고 했죠. 반가운 말이었어요, 마침 저도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거든요. 경기 위축 때문에 사람들은 경험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더군요. 어쨌든 저도 돈이 없었고, 그도 돈이 없었기에 성사된 계약이라고 볼 수 있겠죠.

그가 떠나고 나서, 저는 유리조각을 복제하기에 앞서- 그러니까 기억의 오염도를 평가했어요. 오염도라는 단어가 생소하실 수 있겠는데, 이 세상의 가치관과 얼마나 잘 맞아떨어지는지를 따지는 척도입니다. 특이한 기억이나 평범한 녹아들 수 없는 신념을 가진 사람들의 경험은 호불호가 갈리거든요. 오염도가 높다고 가치 없는 기억은 아닙니다. 잘 안 팔리는 기억일지라도 말이죠. 보통의 가게 주인은 오염도가 높은 기억을 내놓지 않습니다.

그의 기억 오염도는 99% 이상이었어요. 다른 말로 하면, 99% 이상의 사람들은 그 기억을 생소하다고 여길 것이란 뜻입니다.

뭐, 그렇지만 저는 물불 가릴 상황이 아니었죠. 유리조각을 복제했고, 그 기억을 가판대에 올려놓았어요. 오염도는 살짝 낮추어서 적어두었죠. 한 80% 정도. 이게 문제라면, 이제 와서 신고를 하시기에는 꽤 오래 전 일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아무튼 유리조각은 안에서 담배 연기가 흩날리는 것 마냥 흐릿했습니다.

곧 마스크를 한 누군가가 들어와서 그 기억을 사갔죠.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 두 명이 함께 들어오더군요. 그 누군가는 이런 말을 하며 기억을 구매했어요.

“이렇게 불투명한 기억은 처음 봅니다.”

그래서 저도 대꾸했죠.

“수집품이겠네요.”

그 누군가는 수집품을 종이 봉투 안에 대충 집어넣고는 자리를 떠났습니다.

며칠 뒤, 수집품을 구매한 사람의 정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민간기업 프론트의 대표였어요. 요즘 우주의 끝을 바늘로 찔러보겠다며 여러 기술들을 구매중인 그 세계적 기업 프론트가 맞습니다. 그때의 프론트는 기업으로서 훌륭한 곳은 아니었죠. 대표가 인플루언서로 유명할지언정 말입니다. 그는 홀로 기자회견을 열고, 네댓 기자들 앞에서 부끄럽지도 않은지 외쳤습니다. “이 세계는 시뮬레이션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입니다.

“저는 명동 골목의 기억가게에서 흐릿한 경험 하나를 구매했습니다. 그 경험이야말로 저에게 새로움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 세계는 시뮬레이션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렇게 믿으면 정말로 그렇게 됩니다.”

지금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죠. 이 세계가 시뮬레이션이 아니라고 의심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하지만 그때에는 신선한 주장이었어요. 프론트의 대표는 비웃음당했죠. 그가 대체 무슨 기억을 보았길래 궁금해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저는 기회를 잡은 셈이었죠.

곧바로 마케팅에 나섰습니다. '프론트 대표가 사간 그 기억'을 팔아85퍼센트의 수익을 내는 일이었죠.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기억을 구매하겠다고 했어요. 대부분은 대표를 비웃기 위해서였을 겁니다. 그러나 기억을 사간 사람들은 똑같이 외쳤습니다. 이 세계는 시뮬레이션이라고요. 이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주의 끝을 보아야 한다고요.

이슈가 되고, 인터넷에서 바이럴이 되었습니다. 주변 가게에서 이 기억을 사가기도 했어요. 저는 기꺼이 넘겨주었죠. 그때 다시 기억의 오염도를 측정해보니 95% 정도더라고요. 사람들이 이 기억을 조금 더 쉽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증거겠죠.

아참, 지금 이 기억의 오염도는 2%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 이후에 일어난 일은 모두 아시겠죠. 유명한 케이팝 스타가 이 기억의 모델이 되고, 미국 대통령이 이 기억을 국가의 기조로 받아들이고 나서는 쉬웠어요. 전 세계인이 이 세상이 시뮬레이션이라는 것을 믿었죠. 저는 벼락부자가 되어가면서도 두려웠습니다. 이 기억을 팔아도 되는 것인지 윤리적 고민도 했죠. 결국 자본주의에 굴복했지만요. 이걸 직접 들여다본 적은 없습니다. 저도 그 일원이 되어갈까 무서웠거든요. 당신도 20대 초반으로 보이는데, 분명 이 기억을 본 적이 있을 겁니다. 교과서로 채택되었으니까요.

그래서 그 기억을 판 사람은 어디 있냐고요? 없습니다. 죽었거든요.

한창 잊고 있다가, 한 달쯤 전에 그가 알려준 계좌번호로15퍼센트의 금액을 입금해주었죠. 저에게 문자로 말하더군요, 고맙다고. 덕분에'치료'를 받을 돈이 생겼다면서 말이에요. 무슨 치료인지는 언급하지 않았어요. 뭐, 당연하니까요. 저도 금방에야 눈치챘죠.

그리고 나서 연락이 이 주쯤 없다가, 어느 날 일어나 보니 새벽에 문자가 한 통 와 있었어요. “이제 시뮬레이션을 믿지도 않는데 왜 나는 또다시 미친 놈이 되었는가”라는 요지였어요. 이 사회가 정말로 시뮬레이션 설을 받아들여서, 이젠 자신이 시뮬레이션 속에서 살고 있는지 아닌지도 헷갈린다면서요. 걱정이 되어 전화해보니, 다른 사람이 전화를 받더군요. 그 사람은 죽었다네요. 너무 답답해서 출근시간에 8차선 도로로 달려나갔다고 하네요.

말씀드리고 싶은 건 이겁니다. 미쳤다는 게 뭐죠? 그래요, 제가 미쳤던 사람의 기억을 많이 팔았죠. 그렇지만 이제는 그 기억을 가진 사람들은 미친 게 아니에요. 세계는 시뮬레이션'이죠'. 다수가 그렇게 믿으니까요. 거기에 온 세계가 투자를 하고, 사람들이 우주의 끝을 보겠다고 믿게 만든 건 제가 그 기억을 팔았기 때문이지만, 제가 '현재진행형으로 미친' 사람의 기억을 팔았기 때문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제 저에게 '미친 사람의 기억을 판 죄'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이제 누구도 미쳤다고 할 수 없는 세상입니다. 난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겠습니다.

2025.01.31

# #소설

// 끄적끄적 by 예은

“혹시 정치할 생각 있니?”

휴학 상담 때문에 교수님을 찾아뵙고 들은 말입니다. 올해 들은 말 중 제일 기억에 남는 말이었어요. ‘주문 피청구인 윤석열을 파면한다’보다 더 인상깊었습니다.

교수님 입장에서는 물어볼 만했다고 생각합니다. 학생회 일이 너무 바쁘고 힘들어서 휴학계를 내려고 했던 거니까요. 아마 연구에 흥미를 붙이지 못하고 정치를 하러 갈까 봐 우려가 되셨던 것 같습니다. 혹은 연구에도 재미를 붙이고, 정치에도 재미를 붙이거나요. 그게 조금 더 무섭죠.

저는 곧바로 아니라고 했습니다. 정치는 추호도 할 생각이 없다고 했어요. 물론 제 말은 ‘정당에서 어떤 직책도 맡지 않겠다’는 의미였습니다. 교수님께서 그 말을 어떻게 해석하셨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설마 아예 정치에 관심을 끌 거라고 생각하시진 않았겠죠.

관심을 끌 수가 없습니다. 이미 정치적인 존재니까요. 사람은 누구나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는 원론적인 이야기도 좋지만, 저는 오늘 이공계 내부의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과학은 정치와 관련 없어야 한다는 주장은 한참 거슬러 올라갑니다. 보일-홉스 논쟁부터 시작해, 과학은 ‘실험을 통해 중립적으로 생산된다’는 이미지가 주를 이루게 되죠. 과학은 정치로부터 독립적이라는 터무니없는 신화는 지금도 유지됩니다.

과학의 ‘탈정치화’는 과학계의 목소리가 정치에 닿지 못하게 함과 동시에, 과학계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정치를 지워버립니다. 대표적인 예시로 기업 과제가 있죠. 연구실은 기업으로부터 과제를 받아 원하는 결과를 내도록 연구를 수행합니다. 연구는 결국 자본주의적 이해관계 속에서 수행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얻어낸 데이터는 객관적일지 몰라도, 누가 자금을 대고, 어떻게 요약되는가에 따라 충분히 정치적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는 단순히 연구 결과에만 영향이 있는 것이 아닌, 연구실 내부의 문화와 권력관계에도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제가 경험한 연구실들에서는 정치를 언급하는 것이 ‘불편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이공계 특유의 ‘중립’ 분위기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이것이 과학의 탈정치와도 관련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정치적인 존재는 자신을 드러내기 더욱 어려워집니다. 대표적으로 예시를 꼽고 싶은 건 성소수자들입니다. 성 정체성과 지향성을 드러내는 것은 연구실에서는 ‘불필요한 정치’임과 동시에, ‘연구만 잘 하면 된다’는 말로 정체성이 지워집니다. 연구만 잘 하면 된다, 틀린 말이 아니죠. 그러나 존재 자체를 연구실 외의 문제로 취급해 버린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이 글을 읽으며 ‘그렇지만 정치는 정말 필요 없지 않나?’고 생각하시는 분들께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께서 정치를 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과학의 탈정치화는 결국 누구를 보호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나요.

교수님께 정치를 하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 말은 완전히 가능하지 않습니다. 정치가 배제된 것처럼 보이는 공간에서, 어떤 존재는 침묵 없이는 머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침묵을 요구하는 구조야말로, 과학이 여전히 정치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입니다.

이제는 침묵 없이 존재할 수 있는 과학을 상상해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그 첫걸음은, 존재를 문제 삼지 않고 말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2025.04.18

# #에세이

// 끄적끄적 by 예은

앞으로 걷다 보면 세상의 끝이 있대. 곰은 다 해진 가방을 다시 한번 움켜쥐었다. 가방에 달린 플라스틱 키링이 흔들렸다. 곰은 한쪽 눈이 단추 눈으로 바뀌어 있고, 찢긴 허리 쪽 구멍 사이로 솜이 삐죽 나온 인형이다. 한쪽 귀에는 초록색 얼룩이 있는데, 곰은 그 자국을 소중히 여겼다. 여기에서는 누가 바라보지도 않으니까. 주변에는 인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나무가 울창하게 솟아 있었다. 나뭇가지에는 투명한 고치들이 빼곡하게 매달려 있다. 어떤 고치에서는 조용한 자장가 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다른 고치에서는 떠들썩하게 뛰어노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곰은 그만 귀를 틀어막고 싶어졌다. 어쨌든 거기에는 보미가 없을 테니까.

“죽은 사람은 세상의 끝에서 만날 수 있대.” 언젠가 만난 토끼가 말했다. 곰은 보미를 떠올렸다. 곰을 처음 만나고 밋밋하다며 물감통에 귀를 푹 담가버린 보미. 체육대회에 깍두기로 앉아있으면서도 곰을 무릎 위에 올려두었던 보미. 이제는 어른이 되고 싶다고, 곰 같은 건 필요 없다고 말하는 보미. 그런데도 죽기 직전까지 자신을 침대 머리맡에 올려두었던 보미. “동쪽으로 계속 걸어 나가면 세상의 끝을 볼 수 있대. 세상은 평평하니까.” 아무도 가지 않는 동쪽 길을 따라가. 토끼가 거듭 말했다. 토끼는 곰보다 털이 희지만, 알고 있는 건 훨씬 많았다. 그 모습에 홀려 곰은 토끼에게 질문했다. 우리는 왜 헤어지게 된 건지. “나와 보미는 영혼의 단짝이야. 어릴 때부터 보미와 함께였고, 보미가 중학생이 되고 나서도 걔를 봐왔어. 죽을 때도 함께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토끼는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걔한테 네가 소중하지 않았나 보지.” 아니면 네가 들어가기에 유골함이 너무 좁았다거나. 토끼가 덧붙였다. 그 토끼는 세상의 끝으로 먼저 떠났다. 동쪽으로, 무조건 동쪽으로.

세상의 끝으로 가는 길에는 표지판이 없다. 그러나 세상의 끝과 얼마나 가까운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일출을 볼 때마다 태양이 점점 커졌다. 곰은 동쪽에서 떠오르는 태양에 접근하고 있었다. 갈수록 고치의 수는 줄어들고 나무 또한 듬성듬성 심겨 있었다. 점점 날이 뜨거워지고 있었고, 바닥 길이 울퉁불퉁해졌다. 곰은 햇살을 받아 따뜻해진 고치에 가까이 갔다. 고치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문득 곰은 자신이 고치에서 깨어난 그날을 떠올린다. 보미의 침대 위라고 생각했는데 푹신한 고치 껍질 위였다. 주변은 서늘하다시피 고요한 숲속이었다. 그제야 곰은 보미가 이제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의고사를 보겠다고 했는데 성적표를 들고 오지 않았다. 문득 보미가 울고 있을 때 더 힘차게 안아줄 걸 싶었다. 곰은 눈물을 흘릴 수 없었지만 우는 것처럼 눈을 비빌 수는 있었다. 만일 내가 깊은 잠에 빠졌다면 어땠을까. 보미를 기억해 줄 어릴 적 친구는 존재하지 않게 되는 건가. 곰은 보미의 어릴 적 친구를 떠올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유치원 친구 정도밖에 기억나지 않았다. 지민, 현지, 서희, 이제는 보미의 존재를 잊어버릴 만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람이니까. 쉽게 잊는 인간이니까. 곰은 소리가 나지 않는 고치를 지나쳤다.

어느덧 숲이 끝나고, 모래사장이었다. 수평선의 끝이 보였다. 곰은 힘차게 달려가려다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만다. 너무 오랫동안 걸었기 때문이다. 곰은 자신의 짐을 내려놓고 한 걸음씩 세상의 끝을 향해 발을 옮기기 시작한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수평선의 끝에 도달하자 곰은 깨닫는다. 세상의 끝 그 이상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마치 투명한 벽이 쳐진 것처럼, 세상의 끝 너머로 갈 수가 없었다. 토끼도 이런 건 말해주지 않았잖아. 억울했다. 정말로 억울했다. 곰은 한참 동안 내지 않았던 목소리를 내었다. – 보미야, 어딨어. 반응이 없자 더욱 크게 외친다. – 보미야, 돌아와. 보미야.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목소리가 울리지 않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곰은 처절하게 소리친다. – 보미야, 죽지 마. 보고 싶어. 나랑 술래잡기하자. 보미야.  같이 놀자. 모래성 쌓고 싶어.   물감으로 장난치고 싶어. 내 귀 보이지? 나 아직도 귀가 초록색이야.   다 듣고 있지?   그러니까 이제 돌아와…. 곰은 목소리가 갈라질 때쯤 지쳐 쓰러진다. 모래사장에 초록 귀를 한 곰 인형이 남아 있다. 바람이 밀려오고, 곰 인형은 천천히 모래에 묻히게 된다. 서서히, 아주 서서히.

곰은 깨어난다. 작은 꼬마애가 눈을 반짝이며 곰을 들고 있다. “네 이름은 이제부터 곰이야!” 곰은 꼬마애를 바라본다. 꼬마애는 갸웃거리다가 곰을 카트에 태운다. 그리고 이어지는 자기소개. “내 이름은 미영! 너는 곰!” 분명 누군가를 애타게 찾고 있었는데, 곰은 생각한다. 분명 누군가에게 돌아와달라고 외쳤던 기억이 나는데, 정작 누구인지가 생각이 나지 않았다. 혹시 내 앞에 있는 꼬마애가 그 사람일까? 고민하던 찰나 꼬마애가 곰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곰, 이제부터 우리는 친구야!” 곰의 왼쪽 귀에 뭔가 차가운 것이 닿는다. 살펴보니 초록색 클레이가 귀에 묻어 있다. 그제야 곰의 기억이 하나 돌아온다. 내가 찾는 사람은, 왼쪽 귀를 초록색으로 물들이는 사람. 곰은 찾던 사람이 미영이일 수도 있겠다고, 하나의 가능성에 마음을 기울인다. 그래, 나는 미영이를 찾고 있었던 거야. 내가 알던 느낌과는 조금 다르지만…. “앞으로 잘 부탁해!” 미영이는 곰의 손을 잡고 흔든다. 곰은 미영에게 마음속으로 손을 내민다. 잘 부탁해, 미영. 너의 어릴 적 친구가 되어줄게.

2025.04.23

# #소설

// 끄적끄적 by 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