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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단행본 제작 오픈콜: ‘나는 더 이상 정상이고 싶지 않아요.’

출판 프로젝트 공모안을 머릿속에서 쥐어짜고 있었다. 공모의 목적은 정상이라는 기준에 지쳐본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기 위한 것이었다. 한번 도전해보고 싶어서 빈 문서에 글을 썼다 지웠다 했다. 어떻게 하면 참신하게 정상성을 이탈할 수 있을까. 여러 가지 소수자성을 이야기로 엮는 방법이 있을까? 생각하다가 결국 끝에 다다랐다. 음, 나는 상대적으로 사회가 규정하는 정상에 부합하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어지간한 정상성 이탈로는 비비기 힘들겠다. 그만두자.

물론 이런 말들은 반농담이다. 내가 프로젝트에 지원하지 않은 이유는 따로 있다. 그 전에 다른 이야기를 먼저 해보자.

작년도 12월 3일 이후로 광장에 많은 사람이 섰다. 대통령 탄핵에 대한 이야기만 주야장천 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의제가 꺼내어졌다. 많은 사람이 본인이 성소수자이며, 정신질환자이며, 정상 가정에 속하지 않음을 외쳤다. 한참 그런 이야기들을 하다가 다시 대통령 탄핵 이야기로 되돌아가는 과정을 보며 온갖 생각이 들었다. 제일 신경 쓰였던 것은, 광장에 나올 수 있었던 이야기들과 나오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따로 있다는 점이다.

광장은 평등해 보였지만, 사실 누가 말할 수 있는지, 어떤 말이 환영받는지는 여전히 서열화되어 있었다. 용기를 내 말할 수 있는 소수자성이 있고, 낙인이 찍혔거나 접근성 차이로 꺼내지 못한 소수자성이 있다. 광장에서 성노동자에 대한 언급은 여성 차별에 대한 언급보다 훨씬 적었다. 내 지역에서는 장애인 분들이 발언하는 것을 쉽사리 보지 못했는데, 이는 집회에 대한 접근성 차이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집회에서 언급된 소수자성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이유이기도 하다.

내가 출판 프로젝트 공모안 준비를 포기한 이유도 이와 같다. 나는 반쯤 오픈리로 소수자성을 주변에 알리고 다닌다. 내가 소수자성을 알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당당하게 정신질환자이며, 성소수자이며, 한부모 가정임을 드러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만일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반복되어온 뻔한 이야기라면, 이런 말들은 이제 그만 해도 될 것 같았다. 대신, 다른 누군가가 알려지지 않은 소수자성, 낙인찍혀온 소수자성에 대한 목소리를 내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있다. 이것은 ‘카테고리’의 문제가 아니다. 교차적으로, 소수자인 나에 비해서도 더욱 ‘비정상’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소수자성은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계엄 이후의 광장을 통해 깨달았다. 탄핵 이후의 광장은 혼란스럽고 시끄럽기만 하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이미 광장의 가능성을 알고 있다. 지금의 ‘광장’이 언젠가는 어떠한 사람이든 품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출판 공모 링크: https://www.instagram.com/p/DILu7-_T9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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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정치할 생각 있니?”

휴학 상담 때문에 교수님을 찾아뵙고 들은 말입니다. 올해 들은 말 중 제일 기억에 남는 말이었어요. ‘주문 피청구인 윤석열을 파면한다’보다 더 인상깊었습니다.

교수님 입장에서는 물어볼 만했다고 생각합니다. 학생회 일이 너무 바쁘고 힘들어서 휴학계를 내려고 했던 거니까요. 아마 연구에 흥미를 붙이지 못하고 정치를 하러 갈까 봐 우려가 되셨던 것 같습니다. 혹은 연구에도 재미를 붙이고, 정치에도 재미를 붙이거나요. 그게 조금 더 무섭죠.

저는 곧바로 아니라고 했습니다. 정치는 추호도 할 생각이 없다고 했어요. 물론 제 말은 ‘정당에서 어떤 직책도 맡지 않겠다’는 의미였습니다. 교수님께서 그 말을 어떻게 해석하셨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설마 아예 정치에 관심을 끌 거라고 생각하시진 않았겠죠.

관심을 끌 수가 없습니다. 이미 정치적인 존재니까요. 사람은 누구나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는 원론적인 이야기도 좋지만, 저는 오늘 이공계 내부의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과학은 정치와 관련 없어야 한다는 주장은 한참 거슬러 올라갑니다. 보일-홉스 논쟁부터 시작해, 과학은 ‘실험을 통해 중립적으로 생산된다’는 이미지가 주를 이루게 되죠. 과학은 정치로부터 독립적이라는 터무니없는 신화는 지금도 유지됩니다.

과학의 ‘탈정치화’는 과학계의 목소리가 정치에 닿지 못하게 함과 동시에, 과학계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정치를 지워버립니다. 대표적인 예시로 기업 과제가 있죠. 연구실은 기업으로부터 과제를 받아 원하는 결과를 내도록 연구를 수행합니다. 연구는 결국 자본주의적 이해관계 속에서 수행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얻어낸 데이터는 객관적일지 몰라도, 누가 자금을 대고, 어떻게 요약되는가에 따라 충분히 정치적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는 단순히 연구 결과에만 영향이 있는 것이 아닌, 연구실 내부의 문화와 권력관계에도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제가 경험한 연구실들에서는 정치를 언급하는 것이 ‘불편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이공계 특유의 ‘중립’ 분위기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이것이 과학의 탈정치와도 관련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정치적인 존재는 자신을 드러내기 더욱 어려워집니다. 대표적으로 예시를 꼽고 싶은 건 성소수자들입니다. 성 정체성과 지향성을 드러내는 것은 연구실에서는 ‘불필요한 정치’임과 동시에, ‘연구만 잘 하면 된다’는 말로 정체성이 지워집니다. 연구만 잘 하면 된다, 틀린 말이 아니죠. 그러나 존재 자체를 연구실 외의 문제로 취급해 버린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이 글을 읽으며 ‘그렇지만 정치는 정말 필요 없지 않나?’고 생각하시는 분들께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께서 정치를 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과학의 탈정치화는 결국 누구를 보호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나요.

교수님께 정치를 하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 말은 완전히 가능하지 않습니다. 정치가 배제된 것처럼 보이는 공간에서, 어떤 존재는 침묵 없이는 머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침묵을 요구하는 구조야말로, 과학이 여전히 정치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입니다.

이제는 침묵 없이 존재할 수 있는 과학을 상상해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그 첫걸음은, 존재를 문제 삼지 않고 말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2025.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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