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 정치의 모순을 견디는 법
퀴어 운동을 하다 보면 가끔 친구들이 질문을 합니다. 자신은 2D 캐릭터를 사랑하는데 왜 성소수자로 인정받지 못하냐고요. 솔직히 처음에는 혐오자들의 레파토리인 줄 알았는데, 더 이야기해보니 순수하게 궁금해하고 있더라고요. 저는 퀴어라는 것은 사회의 패러다임 속에서 형성된다고 말했습니다. 모든 사랑은 기본적으로 퀴어하나 사회에서는 2D 캐릭터를 향한 사랑을 성소수자라고 부르지 않는다고요. 그러자 돌아온 대답은 이것이었습니다. 본질적으로 정체성 정치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이 대답은 ‘정체성 정치는 나쁜 것’이라는 가정이 깔린 질문이었습니다. 정체성 정치에는 분명히 위험한 면이 있습니다. 당사자와 비당사자를 가르고, 결국에는 ‘당사자’들만 살아남는 구조이죠. 탈락한 당사자들은 당사자성을 인정받지 못합니다. 제일 대표적인 예시가 디지털 래디컬 페미니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성의 범위를 줄이고 축소시켜 기혼자 여성, 트랜스여성, 퀴어 여성들의 연대를 수락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쁜 예시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체성 정치에 강력한 점 또한 있습니다. 강한 단결을 만들어 사회적 가시화를 이루어내는 것 말입니다. 대표적으로 나는 퀴어이다, 나는 퀴어인 것이 자랑스럽다, 라고 외치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기 위해서라면 정체성이 본질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나는 태어나기를 레즈비언으로 태어났다, 와 같은 것이죠. 그래야 고정된 정체성이 타협 불가능한 본질임을 강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전환치료는 무용지물이자 폭력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이때, 정체성이 고정되어있다는 말은 퀴어 이론과는 어긋나 보입니다. 정체성이란 것은 사회의 패러다임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인데, 정체성 정치는 본질주의를 추구하니까요. 그러나 ‘실제로 그런 것’과 ‘그렇게 말하는 것’은 다릅니다. 다시 말해 전략적으로 본질주의를 이용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퀴어 이론을 이해할 수 없고, 이해를 강요해서도 안 되기 때문입니다.
퀴어 운동에서의 정체성 정치가 유효한 것과 별개로, 위험한 점이 많습니다. ‘진짜 퀴어’가 아니라고 배제당하는 퀴어들이죠. 예를 들어 무성애자가 받는 억압이 가짜라고 주장하거나, 이성을 사귀는 바이섹슈얼들에게 사실은 이성애자 아니었냐고 묻는 등의 일입니다. 정체성 정치를 무기로 쓰려면, 그 무기가 본인을 찌르지 않는지 보아야 합니다. 퀴어 운동을 위해서라면 끊임없이 방향성을 성찰하고 퀴어 커뮤니티 내부에서의 흐름을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비당사자의 배척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디지털 래디컬 페미니즘은 자주 남성의 여성의제 연대를 거부하고는 합니다. 이것 또한 정체성 정치의 어두운 면입니다. 그렇다면 퀴어 운동의 정체성 정치에서도 유사한 경험이 있지 않을까요? 퀴어는 아니지만 연대하고 싶은 사람은 정체성 정치의 현장에서 어디로 가야 할까요? 그럴 때 앨라이라는 이름이 빛을 발한다고 생각합니다. 연대자들에게도 정체성을 부여함으로서 일종의 ‘같은 편’으로 포섭하고, 연대자에게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환대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연대자가 의제에서 ‘비당사자’로 남지 않게 되죠.
정체성 정치에는 분명 위험이 따릅니다. 배제의 논리로 작동하는 일이 부지기수입니다. 하지만 정체성 정치는 외부로 내보일 때 강력하고, 가끔은 이 정치적 언어를 계속 사용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끊임없이 커뮤니티 내부를 점검하고, ‘앨라이’라는 연대자로서의 정체성을 부여해 타인을 환대해줄 수 있다면, 퀴어 운동이 조금은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