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미친 건 아니야

‘일신상의 이유’로 힘든 일이 닥칠 때마다 찾게 되는 것들이 있다. 달콤한 것들, 아주 매운 것들, 작년에 멘탈이 어려웠을 때 들었던 노래 등등 말이다. 요즘에도 힘든 일이 몇 가지 있어서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해봤는데 도저히 통하지가 않았다. 고민하다가, 또 고민하다가 3년 전 정말 힘들었을 때 읽던 소설을 꺼내보기로 했다. 제목은 <발리스>고, 작가의 이름은 PKD라는 약칭으로도 흔히 알려진 필립 K. 딕이다.

소설을 꺼내기까지 고민했던 이유는 이 양반이 20세기 중반의 미국 백인 남성이기 때문이었다. 3년 전에는 정치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사회운동가를 꿈꾸는 지금, 갑자기 소설에서 식민주의적인 단어를 마주하게 된다면 너무나 화가 날 것 같았다.

그럼에도 이 책을 꺼낸 이유는, 이전에 이 책을 읽었을 때 분명 ‘정신병 투성이인’ 내용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얻었던 기억이 있어서다. 그 이유를 메모해두지 않아서 잊어버린 나머지, 기억에만 의존해 물살을 가르는 연어마냥 3년 전으로 거슬러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래서 데이터 백업이 중요하다.

이제부터 <발리스>에 대해 주제넘고 선도 넘는 이야기를 해보겠다. 이 책은 잘 쳐주면 신비주의 SF라고 할 수 있겠으나, 솔직히 나는 이게 정신병 일지라고 생각했다. 과거의 내가 보나, 현재의 내가 보나 그 관점은 변하지 않았다. 줄거리를 보면 그 이유를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분신인 호스러버 팻은 분홍색 광선을 맞고 방대한 양의 정보를 접하고서는, 이를 설명할 ‘주해서’라는 책을 집필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이 비합리적인 세상에서 다시 태어나있을 구세주를 찾겠다며 여행을 떠나게 된다.

책 뒤편을 보면, 자살 시도나 정신병원 입원, 친구들과의 ‘주해서’ 토론은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라고 되어 있다. 즉 어떠한 부분에 대해서는 실제 경험을 소설로 옮긴 것이나 다름없다.

책을 1/3쯤 읽을 때쯤, 이런 내용에 위로를 얻었다는 과거의 내가 참 어이없었다. 그냥 다른 사람이 자기 정신병을 문학적 텍스트에 맞게 잘 가공해서 넣은 것뿐이잖아. 더 웃긴 것은 지금의 나도 책을 읽으면서 어느 정도의 위로를 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이상한 위로가 무엇에서 생기는 것인지 알아봐야 했다.

가장 신빙성 있으면서 제일 쓰레기 같은 생각은, ‘이런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구나’ 였다. 다 힘들게 산다는 종류의 위로가 아니었다. 내가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위로였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망상을 하지만 나는 상태가 안 좋았을 때 진지하게 그것들을 믿고는 했다. 사람들이 전부 나를 싫어한다는 생각 같은 것들. 신빙성이 하나도 없는 아이디어는 아니지만, 어쨌든 확신하기에는 아직 공백이 남아 있는 명제를 철썩같이 믿었다. 그러니까 이런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고 사는 사람이 나뿐이 아니었다는 게 위로가 되었던 것 같다. 정말 쓰레기같은 말 한 번 더 하면, 쟤보단 내가 나아 보였다.

두 번째로 쓰레기 같은 생각은, ‘어 나도 그런데’ 였다. 물론 PKD의 생애는 상당히 불행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 양반이 쓴 소설들을 보면 실제로도 꽤나 불행했을 거라고 짐작한다. 생활고, 마약 중독, 5번의 결혼과 이혼. 결혼을 5번이나 한 것으로 보아 연애 경험 0번인 나보다야 낫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꽤나 심각해보이는 PKD의 상태를 보고 약간의 동병상련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

인터넷을 뒤적거리다가 어떤 칼럼을 본 적이 있다. 현재 시행되고 있는 자살 예방 정책은 개인이 자신의 상태를 알리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고, 결국 정신질환자들을 더 고통스럽게 만든다는 내용이었다. 예를 들면 자살방조죄의 존재 때문에 아무에게도 자살 의사를 털어놓지 못한다거나, 자살 시도를 들키면 정신병동에 가기 때문에 시도 후에도 병원에 가지 않는다거나.

대신 칼럼에서는 정신질환자들이 안전하게 자신의 정신질환과 정신적 고난을 공유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지금의 사회적 통념과 대치되는 의견이었다. 현재는 의료인, 심지어 정신질환 당사자들까지도 환자 커뮤니티를 기피하는 경우가 많다. 환자들끼리 있으면 정신질환이 더욱 악화된다는 이유에서다.

내 경험상, 그런 커뮤니티는 다른 주제에 대해서도 에코 체임버의 성격이 강했던 것 같다. 일례로, 그런 커뮤니티에서 정치 이야기를 하면 생산적인 논의보다는 당파 싸움이나 일방적인 혐오로 흐르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에는 신념뿐만 아니라 감정도 반사되어 되돌아오기 마련이다. ‘정신질환자들끼리 모여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커뮤니티 구조 자체가’ 부정적인 감정 공유에 적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전혀 편하지 못한 커뮤니티다.

만약 정신질환자들이 정신적 고난을 편하게 공유할 수 있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내가 이상하거나 유별나거나 잘못된 사람이 아니라는 위로와, 서로를 향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지 않을까. 마치 내가 PKD의 소설을 보고 느꼈던 것처럼 말이다.

기존의 커뮤니티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이것이다. 실시간으로 우울을 ‘전시’함에 따라 생기는 피로와 증폭된 우울감과, 사회적 취약계층을 이용하려 하는 사람들의 등장이다. 어느 정도 우울감을 표출하는 데에 시간 텀을 두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민감정보 교환 혹은 1:1 대화를 막아두면 일차적인 방어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게 내 생각이다.

물론 이런 커뮤니티가 사람을 완전히 ‘고쳐놓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고쳐져야 할까?’ 약물의 도움을 받는다고 해도 누군가는 정신질환을 평생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고, 그런 사람에게 정신질환을 고쳐야 할 것으로 강요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정신질환을 자신의 일부로 ‘정체화’할 수 있는 권리 또한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추상적이고 이상적인 커뮤니티가 사람을 '고치지는' 못하더라도, 덜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가능할 것이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커뮤니티에 대해서는 아이디어를 던져놓은 수준이고, 아직 구체화는 멀었다고 생각한다.)

<발리스>를 읽다 보면 나 혼자만 미쳐있지는 않다는 걸 깨닫게 된다. 3년 전의 내가 ‘이런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게 어렴풋이 기억난다. 나만 그런 건 아니라는 감각. 이 책의 저자만큼은 아니더라도 다들 조금씩은 미쳐있다는 안도감. 따라서 이 글 역시 누군가에게는 편안한 거리에서 읽히는 고백이 되기를 바란다.

#에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