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손에 피가 묻었어
미엘은 앉아 있었다. 발아래에서는 시리다는 말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얼음보다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바람이 뒤엉키는 소리가 요란했다. 귀를 막고 싶을 만큼 시끄럽다고 생각하면서도 미엘은 움직이지 않았다. 먼 곳에서 들려오는 탓이기도 했고 또 그녀의 귀가 지나치게 성능이 좋은 것을 알고 있는 탓이기도 했다. 미엘은 확연한 차이가 없는 일에 굳이 움직일 정도로 부지런한 종족이 아니었다. 하얀 배경에 반해 핏줄이 비쳐 빨갛게 보이는 얇고 긴 귀가 쫑긋거렸다.
하늘마저 새하얗게 질려버린 만년설의 산꼭대기에서 그녀 혼자가 색을 가지고 있었다. 바람마저 비켜간 고요한 산꼭대기에서 미엘만이 숨을 쉬고 있었다. 그것은 숨이 턱하고 막힐 만큼 쓸쓸했지만 미엘은 그 자체로 좋았다. 좋아서 일부러 이 자리를 찾았다. 궁상맞은 짓이라는 자각은 있었지만 이제 구박할 사람도 없으니 아무렴 어떠냐는 심정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탓이었을까 미엘의 뒤로 소리 없이 다가와 말을 거는 사람이 있었다.
“여유 만만이시네요?”
너무 놀라면 오히려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게 된다고 하던가. 잠시 대답이 없던 미엘의 귀가 바르르 가늘게 떨렸다. 마법이 풀리는 듯 느릿한 움직임으로 무릎을 끌어안고 있던 손이 내려와 바닥을 짚고 그제야 천천히 시선이 돌아왔다. 그리고 그 때는 이미 방금 전까지의 미엘처럼 새하얀 원피스 자락을 정리해 끌어안은 여자아이가 옆에 앉아있었다.
“오늘은 제법 쌀쌀한데 괜찮으신가봐요?”
소녀는 어깨에 걸친 숄을 정리하면서 미엘을 향해 웃어보였다. 두 사람이 딛고 앉은 것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그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단단하게 언 눈이라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린 듯했다. 더불어 미엘도 소녀도 맨발에 여름에나 어울릴 얇은 민소매 원피스라는 비현실적인 차림이라는 것도. 미엘은 그런 갭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지적해주지 않았다.
“괜찮아.”
짧게 내뱉은 말과 함께 뿌연 김이 시야를 가렸다. 미엘은 단지 평범한 생물이 아닐 뿐 평범한 온도의 생명체였다.
“바람이 없으니까.”
아―. 소녀는 깨달았다는 듯 대꾸했다. 미엘은 소녀의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산 아래로 눈을 돌렸다. 소녀도 더이상은 할 말이 없는 지 두 사람은 침묵 속에서 함께 까마득하게 멀어보이는 세상을 보고 있었다.
“근데.”
문득 들려온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미엘의 시야 가득히 소녀의 커다란 금빛 눈이 들어왔다. 언제나처럼 가볍게 웃는 인상의 예쁜 얼굴이 어쩐지 낯설었다.
“왜?”
운을 띄워놓고 소녀는 말이 없었다. 잠시 눈을 마주치고 있으니 이윽고 웃는 얼굴이 되었다. 그 모습을 보고 미엘은 반대로 가볍게 아미을 찌푸렸다.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굳이 대답을 들을 필요는 없겠다 싶어졌어요.”
하. 미엘은 나른하게 한숨을 쉬었다.
“그런거면 사람 기다리게 하지마.”
소녀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있지.” “예.”
이번에는 미엘이 운을 띄웠다. 가지런히 모은 무릎에 턱을 올리고 시선을 멀리 한 작은 엘프 소녀의 모습을 하이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마냥 귀엽게 생긴 외견과 매치되지 않는 특유의 나른한 분위기가 시선을 떼기 힘들게 하는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 미엘은 말을 꺼내는 듯 하다가 하―, 하고 다시 한번 길게 숨을 내뱉었다. 가볍게 들이마쉬는 것과 동시에 긴 귀와 작은 날개가 살짝 떴다가 내려갔다. 무슨 말을 해도 상당히 시간이 걸리는 것을 언제나 봐 왔기 때문에 하이는 제촉도 않고 미엘의 말을 기다렸다. 사실 한번도 제촉이 필요했던 적이 없었기에 그런 것 자체를 모르는 하이이기도 했다. 그녀에게는 언제나 시간이 충분했으며 시간을 당기고 싶을 만큼 할 것이 많지도 않았다. 넘치는 시간이 부담스러웠던 적도 없었고 소녀는 언제나 자유로웠다.
“내가 원망스러웠던 적 없어?”
하이는 여전히 먼 곳만 바라보고 있는 미엘을 따라 같이 저 앞을 바라보았다. 온통 하얗기만 한 이 자리와는 정 반대로 초록빛이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짙푸른 녹빛이 흐르고 또 멈춰있었다. 웅장한 풍경이었지만 늘 하얀 세상에서 살아온 하이에게도 낯설지 않은 것이 신기했다. 곁눈으로 돌아보자 미엘의 살랑이는 단발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싱그러운 연두빛은 저 아래 펼쳐진 색과는 달랐지만 분명하게 파릇한 생명의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전혀 없어요.” “아직까지는, 인가.”
이어지듯 내뱉는 미엘의 말을 하이는 부정하지도 그렇다고 긍정하지도 못했다. 단지 묵묵히 '그럴지도요,'하는 모호한 대답을 입에 올렸다. 그리고 침묵이 흘렀다. 두 소녀는 꼼지락거리며 각자 움직일 뿐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새하얀 눈 속에서 멀리 까마득하게 펼쳐진 초록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미엘은 눈송이를 보았다. 완전히 얼어버린 고산 정상에서 발견한 눈 한 송이는 새파란 떡잎보다 어색했다. 미엘은 처음에 눈 앞에서 떨어지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깨닫지 못했다.
“추워지겠어요.”
꿈속을 헤매듯 몽롱했던 정신이 목소리와 함께 손에 닿은 것에 현실로 돌아왔다. 너무 이상한 것이어서 바로는 느끼지 못했지만 알아차리자 손가락 끝에서부터 파르르 소름이 올라오며 온몸이 떨려왔다. 낌새를 알아챈 하이가 미엘을 돌아보았다.
“괜찮아요?” “…응.”
조금 어색한 미소를 띄웠다 지우며 미엘은 하이의 눈을 피했다. 휭하고 찬 기운이 두 사람을 스쳐지나갔다. 아래서 불던 바람이 산등성이를 타고 올라온 모양이었다.
“그럼 들어가요.”
미엘은 하이의 손길에 이끌려 가볍게 달렸다. 순간 확, 하고 펼쳐진 현실이 다시 눈과 귀에서 사라졌다. 손에 닿은 것에서 신경을 떼지 못하고 미엘은 팔랑이는 금발만 바라보며 뛰었다. 바람이 실어온 눈구름이 바삭거리는 하얀 가루를 흩뿌리고 있었다. 미엘의 눈에 하얀 눈밭 위에 흩날리는 하얀 눈송이와 그에 뒤섞여 흐트러진 하이의 웨이브진 금발, 그리고 그 너머 시야 한구석을 차지한 녹음의 숲이 환상처럼 멀게 보였다.
바르작.
작은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그 정체가 무엇인가 확인할 겨를도 없이 그저 달리고 있었다. 내딛는 걸음에서 미엘 자신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다. 문득 보인 자신의 손이 하얗게 얼어있었다.
파짓, 키이.
멈추지 않고 계속되는 작은 소리는 거기서 들려온 것이었다. 미엘은 선명한 빨간 빛을 확인하고 나서야 아프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이의 긴 머리칼이 스친 자리마다 하얀 균열과 함께 엷게 피가 비치고 있었다.
'이대로,'
산산조각 날지도 몰라.
하이가 돌아보았다. 미엘은 멈춰 있었고, 꼭 붙들고 있던 손은 허공을 맴돌았다. 미엘은 어떻게 손을 빼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감각 없이 차가워진 손을 빼내면서 부딪힌 몸이 싸늘하게 식었다는 것만 느낄 수 있었다. 손은 멀쩡했다. 애초에 미엘이 이 정도에 상처입을 리 없었다. 하이는 놀란 얼굴이었다.
“……미안.”
하이는 천천히 편한 자세로 돌아왔다. 여전히 놀란 얼굴이었지만 정신을 수습하는 듯 했다. 미엘과 눈을 마주한 상태로 금발의 소녀는 옷차림을 정리했다. 고개를 살짝 갸웃하고 기울이며 눈을 감았다가 떴다.
“가볼게요.”
언제나처럼 엷게 띄운 미소로 소녀는 돌아섰다. 어느샌가 커져버린 눈보라 너머로 사라지는 소녀의 뒷모습을 미엘은 끝까지 바라보았다. 하이의 모습이 눈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간신히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얼어있던 손은 오히려 처음보다 따뜻했다. 무엇이 그렇게 차가웠는지 이제와서는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로 몸 상태는 평범했다. 미엘은 그대로 그 자리에 서있었다. 온몸을 때리는 눈송이가 따가웠다.
레―미엘―시아르테. 스스로 바꾸고 허락을 받은 이름은 아직도 어색했다. 완전히 속한 것도 그렇다고 아예 벗어난 것도 아닌 세계는 맞지 않는 옷을 걸친 듯 불편했지만 상관없었다. 그저 그 곳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좋다고 생각한 미엘이었다. 옛날과는 다른 모습을 한 것도 관심도 없는 것에 손을 빌려주고 있는 것도 단지 한가지 이유 때문이었지만 아아, 소녀는 생각했다.
'어쩌면 여긴 나에게 맞지 않는 걸지도 몰라.'
그래도 방법은 없었다. 이미 그녀는 자신이 마련한 장소에 짜맞춰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