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섬

미엘은 앉아 있었다. 발아래에서는 시리다는 말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얼음보다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바람이 뒤엉키는 소리가 요란했다. 귀를 막고 싶을 만큼 시끄럽다고 생각하면서도 미엘은 움직이지 않았다. 먼 곳에서 들려오는 탓이기도 했고 또 그녀의 귀가 지나치게 성능이 좋은 것을 알고 있는 탓이기도 했다. 미엘은 확연한 차이가 없는 일에 굳이 움직일 정도로 부지런한 종족이 아니었다. 하얀 배경에 반해 핏줄이 비쳐 빨갛게 보이는 얇고 긴 귀가 쫑긋거렸다.

하늘마저 새하얗게 질려버린 만년설의 산꼭대기에서 그녀 혼자가 색을 가지고 있었다. 바람마저 비켜간 고요한 산꼭대기에서 미엘만이 숨을 쉬고 있었다. 그것은 숨이 턱하고 막힐 만큼 쓸쓸했지만 미엘은 그 자체로 좋았다. 좋아서 일부러 이 자리를 찾았다. 궁상맞은 짓이라는 자각은 있었지만 이제 구박할 사람도 없으니 아무렴 어떠냐는 심정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탓이었을까 미엘의 뒤로 소리 없이 다가와 말을 거는 사람이 있었다.

“여유 만만이시네요?”

너무 놀라면 오히려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게 된다고 하던가. 잠시 대답이 없던 미엘의 귀가 바르르 가늘게 떨렸다. 마법이 풀리는 듯 느릿한 움직임으로 무릎을 끌어안고 있던 손이 내려와 바닥을 짚고 그제야 천천히 시선이 돌아왔다. 그리고 그 때는 이미 방금 전까지의 미엘처럼 새하얀 원피스 자락을 정리해 끌어안은 여자아이가 옆에 앉아있었다.

“오늘은 제법 쌀쌀한데 괜찮으신가봐요?”

소녀는 어깨에 걸친 숄을 정리하면서 미엘을 향해 웃어보였다. 두 사람이 딛고 앉은 것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그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단단하게 언 눈이라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린 듯했다. 더불어 미엘도 소녀도 맨발에 여름에나 어울릴 얇은 민소매 원피스라는 비현실적인 차림이라는 것도. 미엘은 그런 갭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지적해주지 않았다.

“괜찮아.”

짧게 내뱉은 말과 함께 뿌연 김이 시야를 가렸다. 미엘은 단지 평범한 생물이 아닐 뿐 평범한 온도의 생명체였다.

“바람이 없으니까.”

아―. 소녀는 깨달았다는 듯 대꾸했다. 미엘은 소녀의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산 아래로 눈을 돌렸다. 소녀도 더이상은 할 말이 없는 지 두 사람은 침묵 속에서 함께 까마득하게 멀어보이는 세상을 보고 있었다.

“근데.”

문득 들려온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미엘의 시야 가득히 소녀의 커다란 금빛 눈이 들어왔다. 언제나처럼 가볍게 웃는 인상의 예쁜 얼굴이 어쩐지 낯설었다.

“왜?”

운을 띄워놓고 소녀는 말이 없었다. 잠시 눈을 마주치고 있으니 이윽고 웃는 얼굴이 되었다. 그 모습을 보고 미엘은 반대로 가볍게 아미을 찌푸렸다.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굳이 대답을 들을 필요는 없겠다 싶어졌어요.”

하. 미엘은 나른하게 한숨을 쉬었다.

“그런거면 사람 기다리게 하지마.”

소녀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있지.” “예.”

이번에는 미엘이 운을 띄웠다. 가지런히 모은 무릎에 턱을 올리고 시선을 멀리 한 작은 엘프 소녀의 모습을 하이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마냥 귀엽게 생긴 외견과 매치되지 않는 특유의 나른한 분위기가 시선을 떼기 힘들게 하는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 미엘은 말을 꺼내는 듯 하다가 하―, 하고 다시 한번 길게 숨을 내뱉었다. 가볍게 들이마쉬는 것과 동시에 긴 귀와 작은 날개가 살짝 떴다가 내려갔다. 무슨 말을 해도 상당히 시간이 걸리는 것을 언제나 봐 왔기 때문에 하이는 제촉도 않고 미엘의 말을 기다렸다. 사실 한번도 제촉이 필요했던 적이 없었기에 그런 것 자체를 모르는 하이이기도 했다. 그녀에게는 언제나 시간이 충분했으며 시간을 당기고 싶을 만큼 할 것이 많지도 않았다. 넘치는 시간이 부담스러웠던 적도 없었고 소녀는 언제나 자유로웠다.

“내가 원망스러웠던 적 없어?”

하이는 여전히 먼 곳만 바라보고 있는 미엘을 따라 같이 저 앞을 바라보았다. 온통 하얗기만 한 이 자리와는 정 반대로 초록빛이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짙푸른 녹빛이 흐르고 또 멈춰있었다. 웅장한 풍경이었지만 늘 하얀 세상에서 살아온 하이에게도 낯설지 않은 것이 신기했다. 곁눈으로 돌아보자 미엘의 살랑이는 단발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싱그러운 연두빛은 저 아래 펼쳐진 색과는 달랐지만 분명하게 파릇한 생명의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전혀 없어요.” “아직까지는, 인가.”

이어지듯 내뱉는 미엘의 말을 하이는 부정하지도 그렇다고 긍정하지도 못했다. 단지 묵묵히 '그럴지도요,'하는 모호한 대답을 입에 올렸다. 그리고 침묵이 흘렀다. 두 소녀는 꼼지락거리며 각자 움직일 뿐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새하얀 눈 속에서 멀리 까마득하게 펼쳐진 초록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미엘은 눈송이를 보았다. 완전히 얼어버린 고산 정상에서 발견한 눈 한 송이는 새파란 떡잎보다 어색했다. 미엘은 처음에 눈 앞에서 떨어지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깨닫지 못했다.

“추워지겠어요.”

꿈속을 헤매듯 몽롱했던 정신이 목소리와 함께 손에 닿은 것에 현실로 돌아왔다. 너무 이상한 것이어서 바로는 느끼지 못했지만 알아차리자 손가락 끝에서부터 파르르 소름이 올라오며 온몸이 떨려왔다. 낌새를 알아챈 하이가 미엘을 돌아보았다.

“괜찮아요?” “…응.”

조금 어색한 미소를 띄웠다 지우며 미엘은 하이의 눈을 피했다. 휭하고 찬 기운이 두 사람을 스쳐지나갔다. 아래서 불던 바람이 산등성이를 타고 올라온 모양이었다.

“그럼 들어가요.”

미엘은 하이의 손길에 이끌려 가볍게 달렸다. 순간 확, 하고 펼쳐진 현실이 다시 눈과 귀에서 사라졌다. 손에 닿은 것에서 신경을 떼지 못하고 미엘은 팔랑이는 금발만 바라보며 뛰었다. 바람이 실어온 눈구름이 바삭거리는 하얀 가루를 흩뿌리고 있었다. 미엘의 눈에 하얀 눈밭 위에 흩날리는 하얀 눈송이와 그에 뒤섞여 흐트러진 하이의 웨이브진 금발, 그리고 그 너머 시야 한구석을 차지한 녹음의 숲이 환상처럼 멀게 보였다.

바르작.

작은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그 정체가 무엇인가 확인할 겨를도 없이 그저 달리고 있었다. 내딛는 걸음에서 미엘 자신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다. 문득 보인 자신의 손이 하얗게 얼어있었다.

파짓, 키이.

멈추지 않고 계속되는 작은 소리는 거기서 들려온 것이었다. 미엘은 선명한 빨간 빛을 확인하고 나서야 아프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이의 긴 머리칼이 스친 자리마다 하얀 균열과 함께 엷게 피가 비치고 있었다.

'이대로,'

산산조각 날지도 몰라.

하이가 돌아보았다. 미엘은 멈춰 있었고, 꼭 붙들고 있던 손은 허공을 맴돌았다. 미엘은 어떻게 손을 빼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감각 없이 차가워진 손을 빼내면서 부딪힌 몸이 싸늘하게 식었다는 것만 느낄 수 있었다. 손은 멀쩡했다. 애초에 미엘이 이 정도에 상처입을 리 없었다. 하이는 놀란 얼굴이었다.

“……미안.”

하이는 천천히 편한 자세로 돌아왔다. 여전히 놀란 얼굴이었지만 정신을 수습하는 듯 했다. 미엘과 눈을 마주한 상태로 금발의 소녀는 옷차림을 정리했다. 고개를 살짝 갸웃하고 기울이며 눈을 감았다가 떴다.

“가볼게요.”

언제나처럼 엷게 띄운 미소로 소녀는 돌아섰다. 어느샌가 커져버린 눈보라 너머로 사라지는 소녀의 뒷모습을 미엘은 끝까지 바라보았다. 하이의 모습이 눈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간신히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얼어있던 손은 오히려 처음보다 따뜻했다. 무엇이 그렇게 차가웠는지 이제와서는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로 몸 상태는 평범했다. 미엘은 그대로 그 자리에 서있었다. 온몸을 때리는 눈송이가 따가웠다.

레―미엘―시아르테. 스스로 바꾸고 허락을 받은 이름은 아직도 어색했다. 완전히 속한 것도 그렇다고 아예 벗어난 것도 아닌 세계는 맞지 않는 옷을 걸친 듯 불편했지만 상관없었다. 그저 그 곳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좋다고 생각한 미엘이었다. 옛날과는 다른 모습을 한 것도 관심도 없는 것에 손을 빌려주고 있는 것도 단지 한가지 이유 때문이었지만 아아, 소녀는 생각했다.

'어쩌면 여긴 나에게 맞지 않는 걸지도 몰라.'

그래도 방법은 없었다. 이미 그녀는 자신이 마련한 장소에 짜맞춰져 있었다.

#결계안에서는 #임중백가몽

소년과 소녀

 ”하하, 하하, 하하하하, 하하하…….”    공허한 웃음소리는 멀리 퍼지지도 못하고 흩어진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새카만 빛으로 휩싸인 작은 소년은 그저 허탈한 웃음을 뱉어낼 뿐 움직임이 없었다. 소년의 품안에는 반짝이는 금발의 소녀. 하이얀 드레스가 피투성이로 붉게 물들어버렸다. 작디작은 소년의 품안에 역시 작디작은 소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앞으로도 영원히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햇빛이 반짝이며 부서져 내리던 금빛 고수머리도 바람과 함께 춤추던 작은 발도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던 고운 입도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거기에 있지만 없었다. 소년의 창백한 손이 소녀의 어깨를 끌어안은 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소녀의 손가락이 작게 경련을 일으켰다.          “미엘, 미엘. 계속 잠만 잘 거예요? 그러지 말고 오늘은 다 같이 소풍가요. 시안씨랑 같이 맛있는 샌드위치 만들었단 말 이예요. 네? 같이 가요―.”  “므…우…, 귀찮아. 안아, 이거 저기 버려버리고 와…….”  “아하하하.”    아침부터 일어난 소동에 언제나처럼 거실 탁자 위에서 곤히 잠들어있던 시엘 마저 무슨 일인지 보러올 지경이었지만 미엘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수가 있음을 인식한 탓인지 발을 들일 수 없을 만큼 어둡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밝다고는 할 수 없는 방안에서 금빛 고수머리의 소녀는 벌써 몇 시간 째 씨름 중이었다. 사이에 낀 시안은 그저 곤란한 웃음만을 흘릴 뿐 그 어떤 수도 쓸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 모두 고집하나는 끝장나게 세기 때문에 중간 타협점을 받아들이게 할 수가 없었다. 괜히 끼어들었다가는 오히려 피곤해진다. 두 사람 모두와 긴 시간동안 함께 지낸 경험으로 시안은 그 사실을 눈물 나게 잘 알고 있었다.    “난 잘래.”  “아, 결정 나면 깨울게.”    졸음에 반쯤, 아니, 거의 감겨있는 소녀의 눈을 보고도 붙들 수 있는 사람은 없으리라. 시안은 일주일쯤 전혀 못 잔 듯 보이는 모습으로 바닥에 웅크려 순식간에 잠든 시엘에게 얇은 이불을 덮어주었다. 마스터인 미엘이 심심하면 아무데서나 쓰러져서 자기 때문에 청소를 하지 않아도 청결함은 물론 온도까지 완벽하게 조절이 되는 방이었으므로 걱정할 것은 전혀 없었다. 단지 이 방에서 자면 앞으로 언제 일어날 지 알 수 없다는 건 문제일까. 미엘의 방은 모든 환경이 잠자기 좋게 조절되어 있어 아무리 잠이 적은 사람이라도 한번 잠들면 일어나기 힘든 곳이었다.    “아우우, 적당히 자고 좀 일어나요! 그렇게 자면 머리 안 아파요?”  “전혀.”  “나가자니까―요―!!!!!!”  “귀찮아….”    두 소녀의―소녀라고 불릴 수 있는 나이같은 건 생각하지 않기로 하자―실랑이를 바라보며 시안은 다시 허탈하게 웃었다. 두 사람이 하는 모양새를 보면 나들이는커녕 오늘 하루 종일 이러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듯 했다. 정 나들이가 가고 싶으면 미엘을 빼고 가면 될 것을 ‘함께’라는 말을 포기할 수 없는 여자아이는 어떻게든 그녀를 바깥으로 데려갈 모양이었다. 마침내 여자아이는 두 팔을 걷어붙이고 미엘을 침대에서 끌어내기 시작했다. 물론 축 늘어진, 그것도 본인보다 덩치가 큰 사람을 끌어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서 그녀는 미엘의 팔을 붙든 채로 몇 번이나 헛발질을 했다. 그때였다.    “적당히 일어나주지 그래.”    서늘한 목소리가 조금 장난스러웠던 분위기를 단칼에 잘라내었다. 언제, 어떤 곳에 있어도 한눈에 들어올 새빨간 머리카락이 햇빛을 반사해 자극적으로 빛났다. 어두침침한 방안에서 갑자기 접한 햇빛이 눈부셔 시안은 눈을 가렸다. 스스로 빛을 내는 듯 한 붉은 두 눈이 미엘을 향했다. 여자아이는 자신을 향한 시선도 아니건만 손을 놓고 뒤로 물러섰다. 에트리아스는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쓴 미엘을 바라보며 작게 혀를 찼다.    “어차피 져 줄 생각이라면 더 이상 고집부리지 않는 편이 좋아.”  “부.”  “일어나, 얼른.”  “……칫, 에티는 봐주질 않는다니까. 매정해.”  “그쪽에서 쓸데없이 고집피우지 않으면 안 그래.”  “흥, 쳇, 피.”  “그래서, 어디로 갈 건데?”  “에, 에?”    갑자기 자신에게 바통이 내밀어지자 금발의 여자아이는 까만 두 눈을 깜빡일 뿐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에트리아스는 창문에 다시 커튼을 치는 미엘을 바라보며 한 번 더 말했다.    “싫으면 말아.”          햇빛이 나뭇잎사이로 광선처럼 한줄기 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맑은 날이었지만 무성한 나뭇잎 아래는 빛이 닿지 않아 아직 어둑어둑했다. 상록수 숲 특유의 촉촉하고 상쾌한 공기가 가득한 오솔길을 조금 기묘한 일행이 걷고 있었다. 선두에는 파티장이라도 나온 듯 화려한 남성용 예복의 여자아이. 콧노래를 흥얼흥얼, 지팡이를 빙글빙글 돌리며 걸었다. 그녀의 뒤로는 화사한 금발의 소년, 소녀가 커다란 바구니를 들고 웃음꽃을 피웠다. 소년의 가슴 정도밖에 안 오는 작은 소녀는 복슬복슬한 곱슬머리 위에 보닛을 쓰고 하얀 나들이 원피스를 팔랑이며 걸었다. 그녀의 조잘거림에 대꾸하는 소년은 남자아이치고 큰 키가 아니었지만 주변에 온통 고만고만한 키의 여자아이들뿐이었기 때문에 껑충하게 머리가 위로 솟아있었다. 그리고 그런 소년의 뒤에 바짝 붙어 느릿한 걸음으로 전체의 속도를 늦추고 있는 것이 그의 동생. 손가락이 하얗게 될 만큼 소년의 옷을 꼭 쥐고 걸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와 떨어져 같은 일행이라 하기엔 멀고 모르는 사람이라고 치기엔 애매한 거리에 초록빛 숲속에서 눈에 확 들어오는 선홍빛의 소녀가 뒤를 따랐다. 평범하진 않았지만 즐거운 무리. 앞서 걷는 여자아이의 흥얼거림이 뒤쳐진 소녀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햇살은 따스하고 그늘은 서늘한 기분 좋은 나들이.    “마스터, 어디까지 가는 건가요?”    금발의 소년, 시안이 물었다.    “갈 수 있는 곳까지.”    흥얼거리던 박자에 맞추어 선두를 걷던 여자아이, 미엘이 대답했다.    “나 힘들어.”    시안에게 찰싹 붙어 걷던 시엘이 그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꽤 머네요.”    흰 원피스 자락이 하늘거렸다.    “적당히 쉬었다 가는 게 어때?”    붉은 입술을 빠끔거리며 에트리아스가 중얼거렸다. 앞서 걷는 다른 일행은 아무도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으나 미엘만은 정확하게 알아듣고 그녀의 말에 대꾸했다.    “안 돼, 안 돼, 이제 얼마 안 남았어. 엘이 너, 시안이한테 땡깡 피우면 혼난다?”  “흥.”    시엘은 와락 시안의 팔을 끌어안았다. 시안이 넘어질 뻔하며 작은 소란이 일어났고 소녀의 까르륵하는 맑은 웃음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흥얼흥얼흥얼, 노랫소리와 함께 흔들리는 나뭇가지들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대한 나무가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하늘 높은 곳까지 가지를 높고 넓게 펼치고 있었다. 나뭇잎이 무성했고, 그 둘레는 평범한 성인 남성 30명이 손에 손을 잡고 둥글게 서도 모자랄 것 같은 굵은 줄기를 가지고 있었다. 하늘을 떠받힌다는 전설 속의 나무처럼 엄청난 크기. 번듯한 집 한체가 안에 들어앉아있대도 믿어버릴 것 같은 나무를 미엘은 살며시 쓰다듬었다. 사랑하는 이를 만지듯 부드러운 손길이 차가운 나무껍질을 스쳤다. 소녀의 입가에 엷게 미소가 스며든다. 그녀는 휙 돌아서 돗자리를 깔고 바구니에 담아온 것들을 펼치기에 바쁜 세 사람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말했는지 모르겠는데 앞으로도 이 이상 넘어가면 안 돼. 다들 기억해둬.”  “왜?”    모두를 대표해 시엘이 물었다. 나머지 두 사람 역시 묻는 듯한 눈으로 미엘을 바라보았다. 미엘은 대답 대신 얼굴 가득 함박웃음을 머금었다. 그녀의 입에는 어느 샌가 아직 꺼내지도 않은 샌드위치가 물려있었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차린 시안이 한마디 했다.    “그 것만 꺼내신 거예요? 안을 다 뒤집어놓으신 건 아니죠?”  “이거 맛있다.”  “다행히 괜찮아요. 하여간 못 말리는 사람이라니까요.”    금빛 고수머리의 소녀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물론 미엘에게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그저 깔깔깔 한번 웃어주고는 맛있게 샌드위치를 씹을 뿐이었다. 소녀도 그녀의 미안해하는 모습 같은 것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지 뾰로통한 표정으로 하던 일을 계속했다.    “에티, 에티도 와서 좀 먹어봐. 맛있어.”    에트리아스는 부산한 다른 일행과는 달리 아직도 멀리 길 위에 서서 홀린 듯 한 표정으로 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엘은 즐거워 보이는, 그리고 조금은 오만한 미소를 입가에 걸치고 그녀의 목소리도 듣지 못한 듯 보이는 에트리아스를 지긋이 응시했다. 후後좌左우右에서 조잘거리는 대화를 배경음악삼아 사랑스러운 그녀의 인형을 감상한다. 언제나 싱그러운 푸른색으로 가득한 미엘의 숲에서 흰색과 붉은색으로만 치장된 인형은 이질적이지만 눈부시게 빛이 났다.    ‘아름다워.’    취할 듯 강렬한 풀잎의 향기가 와인의 향을 대신해서 감상에 흥을 더했다. 목으로 넘어가는 매끄러운 감각은 안타깝지만 샌드위치로 대신했다. 향기와 입안에 넣을 것. 미엘이 감상 시 필수로 여기는 두 가지였다. 무엇을 볼 때든 그것만은 잊지 않았다.    “이거, 맛있다.”  “엘아, 안된다니까!”  “그렇지만 맛있어.”  “그냥 다 꺼내놓을까요?”  “그게 나을지도……, 하하하.”    시안들은 먹느라 정리하느라 소란스러웠다. 샌드위치를 다 먹은 미엘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고는 다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타박타박 걸어 에트리아스의 앞에 섰다. 그녀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지 시선을 위로만 향하고 있는 에트리아스의 뺨에 손가락을 얹었다. 뺨보다 뜨거운 손의 감촉에 에트리아스가 놀라 시선을 정면으로 떨구었다. 결코 기분좋아보이지는 않는 미소가 에트리아스를 향하고 있었다. 배회하던 시선이 미엘의 그 것과 얽히고, 소녀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사랑하는 에티. 나의 에트리아스.”    미엘의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다물어지며 달콤한 음성을 자아냈다. 범하는 것 같이 뜨겁고 은밀한 시선이 소녀의 온 몸을 훑었다.    ‘미소. 불쾌함이라는 감정을 드러내기 위한 표정.’    미엘의 두 손이 에트리아스의 뺨을 감쌌다. 붉은 미소가 더욱 진해지고 초점을 붙들린 에트리아스의 눈에 미엘의 얼굴이 선명하게 비쳤다.    “훅.”    자연스럽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숨결을 불어넣었다. 미엘의 웃음이 베시시 즐거운 듯 변했다. 불쾌한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조금은 장난스러운 미소. 미엘의 손이 움찔 떠는 에트리아스의 어깨를 붙들고 혀가 아랫입술을 핥았다. 소녀는 몸을 물리는 에트리아스를 눌러 잡고 그대로 입술을 붙였다. 반항 없이 입술이 벌어지고 미엘의 혀가 에트리아스의 입안을 휘저었다.    “읏.”    피부가 맞닿았다 떨어지며 생기는 츗, 하는 소리가 났다. 미엘이 곤란한 듯 당황한 듯 혼란한 듯 어색한 얼굴의 에트리아스를 끌어안았다. 도닥도닥 등을 쓰다듬는 손길이 다정하기만 했다. 얼어붙은 에트리아스를 소중하게 끌어안고 있었다.    “자, 함께 소풍을 즐겨야지?”    발랄한 목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어느 샌가 숨이 막힐 듯 강렬한 시선은 사라지고 없었다. 미엘은 방긋 웃으며 얼떨떨한 상태의 에트리아스를 끌고 돗자리로 돌아왔다. 금발의 여자아이가 밝은 목소리로 두 사람을 맞았다. 숨차게 떠드는 소리, 즐거운 웃음소리, 맛있는 간식. 즐거운 소풍이었다. 평소와 같이 즐거운 소풍이었다.          미엘은 아이의 서투른 콧노래가 마음에 드는 지 기분 좋은 표정이었다. 에트리아스는 굳이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시안과 시엘은 이미 돌아가 자리에 없었다. 남은 것은 금빛 고수머리를 흰 옷자락과 함께 펄럭이며 가볍게 춤을 추고 있는 작은 소녀. 그리고 그 것을 그늘아래서 지켜보고 있는 미엘과 에트리아스 뿐이었다.    “참 용하지 않아, 에티?”    잔뜩 애교를 부린 귀여운 목소리였다. 한껏 기분이 업 되었을 때나 내는 교태어린 목소리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아무것도? 그냥 구경중이야. 켈이가 저렇게나 귀여운걸.”  “…….”    손톱이 길었다면 좋았을걸. 미엘이 중얼거렸다. 손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꼭 움켜쥔 에트리아스의 한 손을 어루만지며 한 말이었다. 애매하게 일그러진 발그레한 뺨에 사랑스럽게 키스를 남긴다. 입맛을 다시듯 자신의 입술을 혀로 핥아내는 모습이 지독히도 사랑스러웠다. 천사의 목소리로 노래하던 소년의 어설픈 허밍이 귓가를 울리고 있었다. 금빛 저녁햇살에 물든 소녀의 하이얀 드레스가 꿈결처럼 아득했다. 그 어느 곳에 있어도 배경과 분리되어 그림자를 드리우던 아이는 그가 좋아하던 소녀와 같이 숲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흑과 백, 색채라고는 보이지 않던 작은 신체는 온갖 빛깔에 둘러싸여―.    “있을 수 없는 일이잖아.”  “어째서? 이미 그렇게 되어 있는데.”  “그런.”    계속 말하려는 에트리아스의 입술에 미엘의 손가락이 가볍게 와닿았다. 쉿, 작게 속삭인 미엘은 너무도 즐거워 보이는 미소를 띄고 있었다.    “분명히 그날 리히트는 죽었어.”  “…….”  “하지만 사라진 건 리히트가 아니지.”  “…….”  “지금 저기에 리히트가 있잖아.”  “…….”  “죽은 사람과 사라진 사람이 언제나 같은 건 아니야. 적어도,”    미엘이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이 행복하게 온 얼굴로 방긋 웃었다.    “꿈속에서는 말이지.”    소년은 붉은 노을아래서 금빛으로 빛나는 머리칼을 흩날리며 하얀 원피스 자락을 가녀린 손가락으로 붙든 체 살랑거리는 바람과 함께 춤을 추었다. 흐릿하게 들려오는 음정이 맞지 않는 노래는 사람이 부르는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신비한 목소리로 연주되고 있었다. 눈웃음 치고 있는 오른쪽 눈은 동공의 부재로 까만 유리구슬 같았다. 나무들이 그의 춤에 맞추어 우수수 소리를 냈다. 까르륵 하는 작은 웃음소리가 섞여들었다.    소년과 소녀가 있었다. 소녀는 세상의 사랑을 받아 반짝거렸다. 소년은 그런 소녀를 세상보다 더 사랑했다. 사람이 소녀를 시기해 칼을 들었다. 하늘이 울던 그날 소녀의 심장이 멈추었다. 소년은 자신의 심장을 소녀에게 주기로 했다. 하지만 끊어진 운명의 실은 다시 이어지지 않아서, 소년은 소녀만을 되찾기로 했다. 그래서 소년은 소녀가 되었다.  그날 소녀는 죽었다. 그날 소년은 사라졌다.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그렇지, 에티?”    에트리아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결계안에서는 #임중백가몽

“안아.”

그녀는 나를 그렇게 불렀다.

“안아, 안 자?”

“벌써 여섯시인걸요. 아침이에요.”

얇은 베일처럼 겹겹이 깔린 어슴푸레한 새벽의 어둠이 가볍게 흔들렸다. 거의 걷혀가는 새벽의 자취가 이 공간의 지배자에게 보일 수 있는 유일한 경외의 표시였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정작 경배를 받은 그녀 본인이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섯시? 우, 그럼 한참 꿈나라에서 헤엄치고 있을 시간이잖아.”

그녀는 잠에 취해 비틀거리며 나를 향해 다가왔다. 한손으로는 늘 그녀의 침대에 뒹굴고 있는 강아지 인형을 끌어안고 나머지 한손으로는 눈을 가리고 있는 상태였다. 정오가 되어도 한밤중처럼 캄캄한 그녀의 방에 비하면 이미 하루가 시작된 이 곳, 거실은 눈이 부신 것이 당연했다. 나는 읽던 책을 내려두고 일어나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럼 다시 방으로 가요. 좀 더 자고 이따가 일어나세요.”

“우우.”

그녀는 투정부리듯 고개를 흔들었지만 달래면서 한 발짝 내딛자 눈앞의 풍경이 바뀌어 있었다. 방금 전까지는 환하게 빛이 들어오던 거실이었는데 지금은 어둑한 복도에 자리한 그녀의 방문 앞이었다. 집안의 다른 이들에겐 열리지 않는 비밀의 문 정도로 알려져 있는 방이지만 사실은 그녀의 침실. 그것도 지금같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을 때는 물론 그녀가 본체로 돌아갔을 때도 편히 쉴 수 있도록 준비해둔 특별한 장소였다. 문이 열리자 바깥과는 완전히 다른 공간인 듯 끝이 보이지 않는 아득한 어둠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 깜깜하네요.”

“졸려-.”

나는 바로 방의 윤곽도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워서 방이 아니라 문 너머로 구멍이 뚫린 듯한 그곳에 차마 발을 들이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거리낌 없이 자연스럽게 문턱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고, 그녀가 내 손목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나 역시 따라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방안은 말 그대로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태. 문에서부터 그녀의 침대까지 이르는 긴 직선상에 부딪칠만한 물건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녀는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가면서도 내 손을 놓지 않았다.

“저 이만 가볼게요.”

“싫어, 옆에 있어.”

거의 잠에 빠져든 상태인 듯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내 손을 더욱 끌어당겨 아예 인형과 함께 품에 안았다. 난 완전히 침대위에 걸터앉게 되어버렸다. 놓아달라는 의미로 그녀의 손을 톡톡 두드려보았지만 그녀는 모르는 척 새근새근 고른 숨소리를 내었다.

“자는 척이라니, 어린애처럼 굴지 마세요, 마스터.”

조용히 불러 보아도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괜히 웃음이 나왔다. 아무것도 보이질 않아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머리를 찾아 침대를 더듬었다. 그녀가 자면서 신경 쓰이지 않도록 얼굴을 덮은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그녀의 이마를 쓸어 넘기는데 갑자기 강한 힘으로 손을 붙들고 있던 팔이 느슨해졌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끝까지 소매에서 떨어지지 않는 손을 조심스레 잡아 그녀의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이따가 낮에 일어나면 다시 손 잡아드릴게요. 그러니까 지금은 참으세요.”

당연히 대답은 없었다. 나는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를 남기고 방을 나왔다. 언제나 그랬지만 이 방은 빠져나갈 때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은은한 빛이 나갈 길을 비추어 주었다. 마치 어느 누구의 접근도 반갑지 않다는 듯 들어오는 이에겐 인색하고 나가는 이에겐 후한 방이었다.


시안이 나가고 문이 닫히자 방안의 풍경이 바뀌었다. 문과 문턱이 맞닿고 ‘잘각’하는 소리로 바깥 공간과 완전히 격리되었음을 깨달은 방이 자신의 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갑자기 방의 크기가 변하거나 벽지, 가구가 바뀌는 등의 큰 변동은 아니다. 방안에서 변한 것은 단 한 가지. 갑자기 나타난 것인지 단순히 커튼에 가려 있었는데 너무 어두워서 눈치 채지 못한 것인지 모를 작은 창문이 나타났을 뿐이었다. 창밖의 풍경은 집안의 다른 장소와는 다르게 한밤중이었다. 어두운 푸른 하늘에 달과 별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맑고 깨끗한 빛이 창문을 통해 들어와 갖가지 잡동사니로 가득한 수납장을 비추었다. 무대 위로 스포트라이트가 떨어지듯 곧은 직선을 그리며 들어온 달빛이 가장 환하게 빛나는 방의 구석에 ‘그녀’또래로 보이는 한 소녀가 서있었다.

소녀는 달빛을 받아 붉고 시리게 빛났다. 붉었다. 소녀의 선명한 선홍색 머리카락은 귀를 덮고 좁고 가녀린 어깨를 만나 갈라졌지만 남은 머리숱만으로도 풍성해 어깨마저 덮고 빈약한 가슴과 등을 타고 흘러내려 통통한 엉덩이와 허벅지, 종아리를 지나 마침내는 바닥에 흩어져버렸다. 어둠 속에서 보아도 눈이 아플 만큼 자극적인 붉은색이 달빛을 받아 소녀의 전신을 감싸고 반짝였다. 가만히 달을 응시하는 그녀의 동그란 두 눈, 그것을 감싼 풍성한 속눈썹과 눈 위의 곧고 짙은 눈썹도 같은 빛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밀랍인형 만큼이나 창백한 그녀의 피부 위에도 머리카락만큼이나 붉은 곳이 있었다. 화장기라곤 전혀 없는 소녀의 양 뺨은 한눈에 띌 만큼 발그스름했고 앙다문 입술은 립스틱을 바른 아가씨의 입술보다도 붉었다. 붉은 빛에 가려져 거의 보이지 않는 여린 몸뚱아리엔 소녀의 피부만큼이나 하얀 민소매 원피스 한 장만이 걸쳐져 있었다. 그것은 마치 소녀의 붉음이 더욱 붉어 보이도록 배경으로 깔아놓은 흰 도화지 같았다.

건조한 무표정과 미세한 움직임조차 없는 모습은 소녀를 살아 있는 생물이 아닌 것처럼 느끼게 했다. 얼핏 보기엔 숨도 쉬지 않는 것 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느린 박자로 가슴이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댕-. 댕-. 댕-.”

창 너머 먼 곳에서 출처를 알 수 없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댕-. 댕-. 댕-.”

느릿하게 퍼지는 종소리의 여운은 이미 깊은 잠에 빠진 아이에게 이불을 덮어주듯 방안을 포근하게 감싸주었다.

“댕-. 댕-. 댕-.”

종소리 사이로 뭔가 다른 소리가 들렸다.

‘일어나’

숨소리 같은 속삭임.

“댕-. 댕-. 댕-.”

“지금이야.”

마지막 종이 울리자마자 들린 것은 조금 전의 환청 같은 소리와는 달랐다. 들릴락 말락 작게 속삭이는 것은 같았지만 분명 방안에서 들려온 것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시작했다.”

붉은 빛의 소녀였다. 소녀의 작은 입술이 달싹였다.

“계속 자고 있을 건가.”

“움…….”

그녀가 몸을 뒤척이더니 옆으로 돌아누웠다. 소녀에게 등을 보이는 방향이었다. 그녀는 뭔가 불편한 듯 얼굴을 찌푸린 체 강아지 인형을 꼭 껴안았다.

“그렇군.”


소녀는 사라졌다. 처음 나타나서 내내 그림같이 한자리에 서 있던 소녀는 말을 끝내자 아무런 낌새도 없이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방안의 풍경은 붉고 커다란 점이 사라졌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바뀐 것이 없었다. 어느 샌가 창에는 속이 비치는 얇은 커튼이 쳐져 있었다. 그녀는 조금 더 어두워진 방안이 마음에 들었는지 행복한 미소를 띠고 편안히 잠들어 있었다.

#결계안에서는 #임중백가몽

붉은 머리를 땅에 끌릴 정도로 길게 기른 창백한 소녀. 길을 잘못 들어 미로에 빠진 당신에게 뜬금없는 질문을 던집니다.

“떠날거야?”

끝없는 미로를 헤매다가 지친 당신은 알 수 없는 직감으로 그에게 대답합니다. 아니오, 라고.

“좋아. 그럼 안내해줄게. 그녀의 꿈 속으로.”

하얀 발이 수풀을 밟고 먼저 나아갑니다. 뒤로 길게 이어지는 붉은 머리칼을 따라 당신은 섬의 깊은 곳으로 향하게 됩니다…


에트리아스 나이미어Etrias Neimir

잃어버린 섬을 지키는 결계석. 결계석을 지키는 외로운 붉음.

소녀는 창백한 뺨에 붉은 입술과 머리칼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표정한 얼굴은 몹시 지친듯해요. 목소리는 작고 거의 어조의 변화가 없습니다. 맨발에 하얀 원피스를 입고, 수풀 속을 소리도 없이 걷지요.

소녀는 그녀의 그림자입니다. 꿈의 가장 깊은 곳에서 고통을 감당하고 있지요. 동시에 섬을 둘러싼 결계, 즉 당신이 헤매던 미로를 관리하는 관리자입니다. 실수로 들어선 이들을 가로막아 나가지도 들어가지도 못하게 하는 게 소녀의 일이에요. 섬으로 들어가길 원하는 이들만이 소녀의 안내를 받아 섬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섬은 꿈 속에 떠있는 섬.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을까요? 어디까지가 진실일까요?

평화로운 일상은, 과연 어디로 향하는 걸까요.

“발을 들인 이상 빠져나갈 수는 없어.”

소녀는 조그맣게 속삭입니다.

#결계안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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