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를 날로 먹었다

윤 대통령 탄핵 후의 5.18을 20일 가량 앞두고

민주주의를 날로 먹었다. 시위에 매주 나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뉴스에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사책을 고루하다며 펼쳐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치 얘기를 농담거리로 치부했기 때문이다. 투표일까지 후보의 공약을 하나도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을 내 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상계엄 당시 우리는 전체학생대표자회의 회의실에 있었다. 학부 총학생회 자치기구들의 예결산안 의결을 하고 있을 때 느닷없이 메신저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윤석열이 계엄했대. 전쟁 난 건 아니지? 큰일이 났다는 사실을 의장이 어렴풋하게 파악했는지, 곧바로 10분간의 정회가 이어졌다.

장난스럽게 반응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중앙비대위장 이름]도 계엄 안 하나? 내 친구는 짓궂은 반응들에 화를 냈다. 이건 정말로 큰일이라고, 우리 다 죽을 수도 있다고. 웃고 떠들 때가 아니라고. 동아리 톡방도 시끄러웠다. 가짜 뉴스와 윤석열의 담화 링크가 톡방을 떠돌아다녔다.

정회가 끝나자 회의는 이어졌고, 다행히 전학대회는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산회 후 중앙비대위장은 중앙운영위원들을 불러서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상황 봤겠지만, 내일 소집 소요가 있을 수도 있다. 현 상황을 트래킹하고 있겠다.

계엄이 해제된 것은 당시 전학대회에서 '정치'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던 우리에게는 정말 천만다행이었다.

그다음부터는 모든 학우가 아는 대로다. 계엄은 해제되었고, 대학가에서 시국선언 바람이 불어 우리 학교도 시국선언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중앙운영위원회에서의 토론 끝에 규탄문을 쓰는 방향으로 의결이 되었다. 나를 포함한 중앙운영위원들은 비상계엄에 대한 규탄문을 작성했다. 아마 다들 처음 써본 규탄문이지 싶다. 그러고서는 학생총회가 열리고, 시국선언이 가결되어 진행했다.

당시는 나에게 자아분열의 시간이었다. 인간으로서의 나는 간절하게 시국선언을 원했다. 반면 자치기구장으로서의 나는 의견을 대표할 책임이 있었다. 과 대표들끼리의 의견이 갈리는 상황이었고, 나는 중앙운영위원회에서 소극적인 스탠스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그때의 행동이 학생자치적으로만 봤을 때 잘못된 것은 아니다. 모두의 의견을 수렴하는 것은 자치기구장으로서의 책임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저 학생사회가 어쩌다 이렇게 '탈정치'를 빙자한 '중립 아닌 중립'을 추구하게 되었는지, 그것이 고민스러울 뿐이다. 그리고 내가 왜 그들을 설득하려 하지 않았는지도.

그러나 나의 태도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관점으로써는 크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학생총회에서 시국선언이 가결되자마자 교내 시국선언과 대학 연합 시국선언에 학우 개인으로서 적극적으로 참석하였다. 하지만 그것이 죄책감을 덜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것은 여전히 부끄럽다.

전남대학교에 가면 벽에 사람들의 이름이 가득 쓰여 있다고 한다. 죽은 사람들의 이름 아래에는 사망 사유가 있다고 한다. 기숙사에서 사망한 채 발견. 행방불명. 전남도청 앞 발포로 사망. 민주화를 위해 희생하신 전남대학교 열사분들을 기리기 위한 벽이라고 한다.

며칠 전에는 <소년이 온다>를 읽어보았다. 뻔한 감상밖에 떠올리지 못하는 내가 원망스러웠다. 특히 '이번 비상계엄이 해제되어서 운이 좋았다'라는, 죽음과 억압을 겪은 사람들로부터 안전한 거리에 서 있는듯한 나 자신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누군가의 죽음을 배경 삼아 나의 행운을 확인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모든 죽음을 목도하며, 그동안 나는 민주주의를 누리기만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각해 보면 비상계엄 이전까지 나는 정치에 관심이 없다시피 했다. 투표일마다 관성적으로 1번을 눌렀다. 정치 뉴스가 지루하다고 생각했고, 가끔은 농담거리로 삼았다. 학생사회에서 일하며 운동권을 지망하기도 했지만, 정작 운동권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다. 여전히 역사책을 펼쳐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학생사회에서 일하면서 비상계엄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더라. 대학 본부가 무섭다며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학생 대표를 설득해 볼 생각 없이 기권을 눌렀었다. 매일 밤을 새우며 뉴스를 확인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국가에서 일어나는 사건보다는 학생회의 문제를 더 심각하게 여겼다. 고백하자면 집회에 나가는 날보다 나가지 않는 날이 더 많았던 것 같다.

모든 것이 내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윤 대통령의 탄핵 소식을 듣고도 적당히만 기뻤나 보다.

이왕 민주주의를 날로 먹었으니, 적어도 유지하기 위해서 힘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는 민주적으로 운영되지 못하는 단체들이 많다. '내가 속한 공간만큼은'을 넘어서, 연대의 힘을 믿고 민주주의를 지키는 데에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요 며칠 다양한 투쟁 현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내가 알지 못한 투쟁들이 이렇게 많았다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최후의 수단임에도 그 수가 많은 고공농성, 구사대를 동원한 폭력이 가해진 시위, ‘불법 시위’로 공공기관에 프레이밍 당한 집회들. 그리고 내가 미처 몰랐기 때문에, 혹은 SNS에서 이슈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나열한 수많은 투쟁. 그 투쟁들에도 우리는 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광장은 나의 성장에 큰 역할을 해주었다고 생각한다. 케이팝 음악에 맞추어 응원봉을 흔드는 집회가 있었기에, 내가 이 세계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이제는 책임을 감당하는 사람으로, 언제나 어딘가의 광장에 서 있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더 이상 외면하지 않겠다고 오늘의 나로 선언해 본다.

# #에세이

// 끄적끄적 by 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