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ce

일기

인생 두 번째 서퀴인데 부스러가 되었다. 부스 안쪽이 훨씬 더운데도 처박혀있는 것이 나았다. 밖은 인파로 넘치고 굿즈 영업 소리가 째질 듯이 들렸다. 사람이 무서울 시기는 지났지만 어쨌든 바글거리는 서울에 적응 안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문득 상대적으로 한적하던 대전 퀴퍼가 떠올라 더 움츠러들었다. 아, 난 서울이 너무 힘들다. 정말 힘들다.


솔직히 저 한 문단이 서퀴의 모든 것을 설명해주기는 한다. 그래도 후기를 쓰려고 마음먹은 이상, 인파 타령만 하고 있을 수는 없으니 머릿속에 담아놓은 걸 얘기해야겠다.

자본주의 퀴퍼에 대해 한번 얘기해보고 싶다. 서퀴에 가면 온갖 후원리워드를 파는 부스들이 많다. 간혹 대기업이 참여하는 경우도 흔하다. 퀴퍼의 자본화가 우려된다는 말도 상당할 정도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나뉘는 것 같다. 하나는, 축제가 시장바닥이 되어 운동성을 잃어간다는 것. 하나는 대형 자본의 개입으로 퀴퍼의 본질이 손상되는 것.

후원리워드에 대해 해명을 하자면, 소규모 퀴어 운동 단체들은 대부분 돈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대부분의 퀴어 단체들은 후원과 기금으로 굴러간다. 서울퀴퍼는 가장 많은 사람이 오는 퀴퍼이며 후원금을 쌓기 가장 좋은 장소이다. 어쩔 수 없다. 굿즈를 팔아서 후원금을 쌓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멸종할지도 모르니까. 더러운 세상에서는 돈이 있어야 운동도 할 수 있다. 기왕이면 단체들이 지속성을 가질 수 있게 도와주면 좋겠다.

후자에 대해 설명해보겠다. 간혹 유럽이나 미국처럼 한국의 퀴퍼가 기업과 상업화로 변질될까 우려하는 시선들이 눈에 띈다. 기업 로고에 무지개를 입히고 퀴어 상품들을 판매하지만, 정작 인권 개선에는 소극적인 그런 퀴퍼. 거대 자본기업의 핑크워싱이 판치는 것은 정말로 원치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퀴퍼'에 대한 '불매' 운동으로 번질까 걱정이 된다. 결국 대응 방식이 소비자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일 퀴퍼의 자본화가 걱정된다면, 직접 참여로 퀴퍼의 운동성을 확장시키는 것이 어떨까 싶다. 교차적인 의제에 대한 몸자보를 입고 간다든지, 행진에 직접 만든 피켓을 들고 나선다든지, 혹은 조직위에 뛰어든다든지.

아무튼 모쪼록 대한민국의 퀴퍼가 운동성을 잃지 않았으면 한다. 퀴퍼가 안전하고 예쁜 공간으로만 남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건 또 다른 이야기지만, '퀴어퍼레이드' 하면 자동으로 서울만을 연상시키는 경우가 많다. 서퀴를 아예 퀴퍼라고 줄여 부르는 경우도 많다. 사람들이 지역의 퀴어퍼레이드에도 신경을 많이 써줬으면 좋겠다. 지방에도 많이 놀러와주세요. 여기에도 퀴어 살아요.


서울퀴퍼에서 받은 스티커들을 정리하고, 후기를 쓰려고 하니까 있는 사진이 거의 없더라. 사람 얼굴이 안 나오게 사진을 찍으려다 보니까, 유일한 사진이 진보당 현수막밖에 없다. 다음 서퀴 전에는 발의가 되어서 통과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원내정당이니까 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투쟁.

#에세이 #일기

5.18 기행을 다녀오고 나서 사진 몇 장이 남았다. 사진을 들여다보는데 실감이 하나도 나지 않았다. 내가 정말로 5.18의 현장에 다녀왔었다고? 그만큼 현장에서 받은 충격이 컸던 것 같다. 전일빌딩에 남아있던 총탄 흔적이며, 묘역에 안치되었던 수많은 열사분들도.

이번 5.18 기행은 당일치기였다. 내심 전야제에도 참석하고 싶었기 떄문에 당일치기인 게 아쉬웠다. 이번 스케줄은 전일빌딩과 기록관에 갔다가 5.18 묘역에 가는 것이었다. 근처 YMCA 건물이었던 곳에서 든든하게 김치찌개를 먹고 출발했다.

전일빌딩이 왜 전일빌딩인가 했더니 전남일보 빌딩의 약자였다. 전일빌딩에서는 실제로 남아있는 헬기 사격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시민한테 총을 쏜 것도 모자라서 헬기를 띄워 전남일보 빌딩에 쏘았다고 한다. 기둥 하나에 몇십 개의 총알 자국이 남아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목격자도 많았고. 그런데 아직도 전두환 세력은 헬기 사격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전일빌딩의 전망대에서는 5.18 당시 17일에 사람들이 연설을 했던 분수대도 볼 수 있었다. 전 전남도청 앞에 분수대가 있었는데, 거기에서 이번 윤석열 퇴진 집회 때에도 연설을 했다고 한다. 역사가 이어지는 순간이구나 싶었다.

같이 기행을 간 후배가 나한테 사진 한 장을 보여줬다. 전일빌딩 앞에서 시계탑 사진을 찍으려고 했는데 앞에 현수막이 걸려있었다고 한다. 국힘 대선후보인 김문수의 현수막이었다. 12.3 비상계엄 당시 협력했던 그들 말이다. 이제 와서 ‘비상계엄은 내란이 아니지만, 계엄은 잘못되었으니 사과한다’라고 말해봤자 뭐하나. 우리는 정말 아직도 내란 세력들을 뿌리뽑지 못하고 있다.

이후 스케줄은 5.18 국립 묘역이었다. 묘역에 가면 영적인 경험을 할 수 있다고 해서, 유령 같은 건 안 믿는다며 씩씩하게 다녀올 것을 맹세했는데, 후반부에 깨지고야 말았다. 투쟁하다 죽은 사람이 너무 많았다. 울 것 같이 거의 압도당하는 기분으로 신묘역을 돌아다녔다.

열사분들에 대한 설명을 들었는데 사실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대신 '임을 위한 행진곡'이 5.18 민중항쟁의 두 열사를 기리기 위한 곡이라는 것이 기억난다. 퇴진 집회에서 들었던 노래가 5.18을 기리기 위한 노래였고, 즉 5.18이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의 마음에 새겨져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 국립묘역에서 다짐을 정말 많이 했다. 그때 돌아가신 열사분들의 정신을 이은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한강 작가님께서 언젠가 말씀하셨듯,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릴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이라고 생각한다. 그때의 죽은 자가 오늘의 산 자를 살렸듯이, 오늘의 투쟁은 우리의 몫이다. 그렇게 다짐했던 것 같다.

기행이 끝나고 나서 집으로 오는 길에 대선 토론회를 봤다. 거기에서 정말 다양한 헛소리를 접한 것 같다. 제일 황당했던 건 누군지 모를 보수 후보의 ‘거기는 반미 아닙니까?’ 언급. 그런 말들을 참으며 꾸역꾸역 토론회를 봤다. 그리고 이런 사회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뭔지 생각해보았다. 결론은 이랬다. 조금이라도 행동하는 것, 그리고 조금이라도 기억하는 것. 그 정신을 잊지 않기 위해 매년도 5.18마다 광주에 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 #일기 #에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