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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universe we became

저는 신념을 파는 사람이 아닙니다. 음모론을 퍼뜨릴 생각도 없었고요.

그의 기억을 판매한 것이 잘못인가요? 소비자들은 다양한 경험을 원하고, 그의 기억도 색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었을 뿐입니다. 저는 단순히 시장의 원칙을 따랐습니다. 그저 그의 경험을 가판대에 올려놓았을 뿐이에요. 그 이후의 일은 제 책임이 아닙니다.

질문을 바꾸시네요. 그가 얼마나 미쳐 있었냐고요? 미쳤다는 게 무엇인지에 따라 달라지겠죠. 하긴, 그때도 그는 충분히 미쳐 있었어요.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을 때 말이죠. 그래,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때 말입니다.

그가 처음 나무 문을 여는 방식도 특이했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들어오길래 저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물어봤죠. 기억 가게에도 자신을 감시하는CCTV가 있는지 궁금해서 그랬다고 하더군요. 저는 너털웃음을 지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전부 감시당하고 있고, 미세 권력에 따라 통제당하고 있다고 하니 그가 만족스럽게 웃더군요.

그는 살포시 흐리멍덩한 유리조각을 꺼내 저에게 건네주었어요. 그 자신으로부터 추출한 기억이었죠. 얼마에 팔 것이냐고 묻자 그는 공짜라고 했어요. 단 판매 수익의15퍼센트를 자신에게 달라고 했죠. 반가운 말이었어요, 마침 저도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거든요. 경기 위축 때문에 사람들은 경험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더군요. 어쨌든 저도 돈이 없었고, 그도 돈이 없었기에 성사된 계약이라고 볼 수 있겠죠.

그가 떠나고 나서, 저는 유리조각을 복제하기에 앞서- 그러니까 기억의 오염도를 평가했어요. 오염도라는 단어가 생소하실 수 있겠는데, 이 세상의 가치관과 얼마나 잘 맞아떨어지는지를 따지는 척도입니다. 특이한 기억이나 평범한 녹아들 수 없는 신념을 가진 사람들의 경험은 호불호가 갈리거든요. 오염도가 높다고 가치 없는 기억은 아닙니다. 잘 안 팔리는 기억일지라도 말이죠. 보통의 가게 주인은 오염도가 높은 기억을 내놓지 않습니다.

그의 기억 오염도는 99% 이상이었어요. 다른 말로 하면, 99% 이상의 사람들은 그 기억을 생소하다고 여길 것이란 뜻입니다.

뭐, 그렇지만 저는 물불 가릴 상황이 아니었죠. 유리조각을 복제했고, 그 기억을 가판대에 올려놓았어요. 오염도는 살짝 낮추어서 적어두었죠. 한 80% 정도. 이게 문제라면, 이제 와서 신고를 하시기에는 꽤 오래 전 일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아무튼 유리조각은 안에서 담배 연기가 흩날리는 것 마냥 흐릿했습니다.

곧 마스크를 한 누군가가 들어와서 그 기억을 사갔죠.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 두 명이 함께 들어오더군요. 그 누군가는 이런 말을 하며 기억을 구매했어요.

“이렇게 불투명한 기억은 처음 봅니다.”

그래서 저도 대꾸했죠.

“수집품이겠네요.”

그 누군가는 수집품을 종이 봉투 안에 대충 집어넣고는 자리를 떠났습니다.

며칠 뒤, 수집품을 구매한 사람의 정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민간기업 프론트의 대표였어요. 요즘 우주의 끝을 바늘로 찔러보겠다며 여러 기술들을 구매중인 그 세계적 기업 프론트가 맞습니다. 그때의 프론트는 기업으로서 훌륭한 곳은 아니었죠. 대표가 인플루언서로 유명할지언정 말입니다. 그는 홀로 기자회견을 열고, 네댓 기자들 앞에서 부끄럽지도 않은지 외쳤습니다. “이 세계는 시뮬레이션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입니다.

“저는 명동 골목의 기억가게에서 흐릿한 경험 하나를 구매했습니다. 그 경험이야말로 저에게 새로움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 세계는 시뮬레이션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렇게 믿으면 정말로 그렇게 됩니다.”

지금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죠. 이 세계가 시뮬레이션이 아니라고 의심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하지만 그때에는 신선한 주장이었어요. 프론트의 대표는 비웃음당했죠. 그가 대체 무슨 기억을 보았길래 궁금해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저는 기회를 잡은 셈이었죠.

곧바로 마케팅에 나섰습니다. '프론트 대표가 사간 그 기억'을 팔아85퍼센트의 수익을 내는 일이었죠.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기억을 구매하겠다고 했어요. 대부분은 대표를 비웃기 위해서였을 겁니다. 그러나 기억을 사간 사람들은 똑같이 외쳤습니다. 이 세계는 시뮬레이션이라고요. 이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주의 끝을 보아야 한다고요.

이슈가 되고, 인터넷에서 바이럴이 되었습니다. 주변 가게에서 이 기억을 사가기도 했어요. 저는 기꺼이 넘겨주었죠. 그때 다시 기억의 오염도를 측정해보니 95% 정도더라고요. 사람들이 이 기억을 조금 더 쉽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증거겠죠.

아참, 지금 이 기억의 오염도는 2%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 이후에 일어난 일은 모두 아시겠죠. 유명한 케이팝 스타가 이 기억의 모델이 되고, 미국 대통령이 이 기억을 국가의 기조로 받아들이고 나서는 쉬웠어요. 전 세계인이 이 세상이 시뮬레이션이라는 것을 믿었죠. 저는 벼락부자가 되어가면서도 두려웠습니다. 이 기억을 팔아도 되는 것인지 윤리적 고민도 했죠. 결국 자본주의에 굴복했지만요. 이걸 직접 들여다본 적은 없습니다. 저도 그 일원이 되어갈까 무서웠거든요. 당신도 20대 초반으로 보이는데, 분명 이 기억을 본 적이 있을 겁니다. 교과서로 채택되었으니까요.

그래서 그 기억을 판 사람은 어디 있냐고요? 없습니다. 죽었거든요.

한창 잊고 있다가, 한 달쯤 전에 그가 알려준 계좌번호로15퍼센트의 금액을 입금해주었죠. 저에게 문자로 말하더군요, 고맙다고. 덕분에'치료'를 받을 돈이 생겼다면서 말이에요. 무슨 치료인지는 언급하지 않았어요. 뭐, 당연하니까요. 저도 금방에야 눈치챘죠.

그리고 나서 연락이 이 주쯤 없다가, 어느 날 일어나 보니 새벽에 문자가 한 통 와 있었어요. “이제 시뮬레이션을 믿지도 않는데 왜 나는 또다시 미친 놈이 되었는가”라는 요지였어요. 이 사회가 정말로 시뮬레이션 설을 받아들여서, 이젠 자신이 시뮬레이션 속에서 살고 있는지 아닌지도 헷갈린다면서요. 걱정이 되어 전화해보니, 다른 사람이 전화를 받더군요. 그 사람은 죽었다네요. 너무 답답해서 출근시간에 8차선 도로로 달려나갔다고 하네요.

말씀드리고 싶은 건 이겁니다. 미쳤다는 게 뭐죠? 그래요, 제가 미쳤던 사람의 기억을 많이 팔았죠. 그렇지만 이제는 그 기억을 가진 사람들은 미친 게 아니에요. 세계는 시뮬레이션'이죠'. 다수가 그렇게 믿으니까요. 거기에 온 세계가 투자를 하고, 사람들이 우주의 끝을 보겠다고 믿게 만든 건 제가 그 기억을 팔았기 때문이지만, 제가 '현재진행형으로 미친' 사람의 기억을 팔았기 때문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제 저에게 '미친 사람의 기억을 판 죄'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이제 누구도 미쳤다고 할 수 없는 세상입니다. 난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겠습니다.

2025.01.31

# #소설

“혹시 정치할 생각 있니?”

휴학 상담 때문에 교수님을 찾아뵙고 들은 말입니다. 올해 들은 말 중 제일 기억에 남는 말이었어요. ‘주문 피청구인 윤석열을 파면한다’보다 더 인상깊었습니다.

교수님 입장에서는 물어볼 만했다고 생각합니다. 학생회 일이 너무 바쁘고 힘들어서 휴학계를 내려고 했던 거니까요. 아마 연구에 흥미를 붙이지 못하고 정치를 하러 갈까 봐 우려가 되셨던 것 같습니다. 혹은 연구에도 재미를 붙이고, 정치에도 재미를 붙이거나요. 그게 조금 더 무섭죠.

저는 곧바로 아니라고 했습니다. 정치는 추호도 할 생각이 없다고 했어요. 물론 제 말은 ‘정당에서 어떤 직책도 맡지 않겠다’는 의미였습니다. 교수님께서 그 말을 어떻게 해석하셨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설마 아예 정치에 관심을 끌 거라고 생각하시진 않았겠죠.

관심을 끌 수가 없습니다. 이미 정치적인 존재니까요. 사람은 누구나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는 원론적인 이야기도 좋지만, 저는 오늘 이공계 내부의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과학은 정치와 관련 없어야 한다는 주장은 한참 거슬러 올라갑니다. 보일-홉스 논쟁부터 시작해, 과학은 ‘실험을 통해 중립적으로 생산된다’는 이미지가 주를 이루게 되죠. 과학은 정치로부터 독립적이라는 터무니없는 신화는 지금도 유지됩니다.

과학의 ‘탈정치화’는 과학계의 목소리가 정치에 닿지 못하게 함과 동시에, 과학계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정치를 지워버립니다. 대표적인 예시로 기업 과제가 있죠. 연구실은 기업으로부터 과제를 받아 원하는 결과를 내도록 연구를 수행합니다. 연구는 결국 자본주의적 이해관계 속에서 수행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얻어낸 데이터는 객관적일지 몰라도, 누가 자금을 대고, 어떻게 요약되는가에 따라 충분히 정치적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는 단순히 연구 결과에만 영향이 있는 것이 아닌, 연구실 내부의 문화와 권력관계에도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제가 경험한 연구실들에서는 정치를 언급하는 것이 ‘불편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이공계 특유의 ‘중립’ 분위기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이것이 과학의 탈정치와도 관련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정치적인 존재는 자신을 드러내기 더욱 어려워집니다. 대표적으로 예시를 꼽고 싶은 건 성소수자들입니다. 성 정체성과 지향성을 드러내는 것은 연구실에서는 ‘불필요한 정치’임과 동시에, ‘연구만 잘 하면 된다’는 말로 정체성이 지워집니다. 연구만 잘 하면 된다, 틀린 말이 아니죠. 그러나 존재 자체를 연구실 외의 문제로 취급해 버린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이 글을 읽으며 ‘그렇지만 정치는 정말 필요 없지 않나?’고 생각하시는 분들께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께서 정치를 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과학의 탈정치화는 결국 누구를 보호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나요.

교수님께 정치를 하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 말은 완전히 가능하지 않습니다. 정치가 배제된 것처럼 보이는 공간에서, 어떤 존재는 침묵 없이는 머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침묵을 요구하는 구조야말로, 과학이 여전히 정치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입니다.

이제는 침묵 없이 존재할 수 있는 과학을 상상해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그 첫걸음은, 존재를 문제 삼지 않고 말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2025.04.18

# #에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