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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일신상의 이유’로 힘든 일이 닥칠 때마다 찾게 되는 것들이 있다. 달콤한 것들, 아주 매운 것들, 작년에 멘탈이 어려웠을 때 들었던 노래 등등 말이다. 요즘에도 힘든 일이 몇 가지 있어서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해봤는데 도저히 통하지가 않았다. 고민하다가, 또 고민하다가 3년 전 정말 힘들었을 때 읽던 소설을 꺼내보기로 했다. 제목은 <발리스>고, 작가의 이름은 PKD라는 약칭으로도 흔히 알려진 필립 K. 딕이다.

소설을 꺼내기까지 고민했던 이유는 이 양반이 20세기 중반의 미국 백인 남성이기 때문이었다. 3년 전에는 정치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사회운동가를 꿈꾸는 지금, 갑자기 소설에서 식민주의적인 단어를 마주하게 된다면 너무나 화가 날 것 같았다.

그럼에도 이 책을 꺼낸 이유는, 이전에 이 책을 읽었을 때 분명 ‘정신병 투성이인’ 내용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얻었던 기억이 있어서다. 그 이유를 메모해두지 않아서 잊어버린 나머지, 기억에만 의존해 물살을 가르는 연어마냥 3년 전으로 거슬러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래서 데이터 백업이 중요하다.

이제부터 <발리스>에 대해 주제넘고 선도 넘는 이야기를 해보겠다. 이 책은 잘 쳐주면 신비주의 SF라고 할 수 있겠으나, 솔직히 나는 이게 정신병 일지라고 생각했다. 과거의 내가 보나, 현재의 내가 보나 그 관점은 변하지 않았다. 줄거리를 보면 그 이유를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분신인 호스러버 팻은 분홍색 광선을 맞고 방대한 양의 정보를 접하고서는, 이를 설명할 ‘주해서’라는 책을 집필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이 비합리적인 세상에서 다시 태어나있을 구세주를 찾겠다며 여행을 떠나게 된다.

책 뒤편을 보면, 자살 시도나 정신병원 입원, 친구들과의 ‘주해서’ 토론은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라고 되어 있다. 즉 어떠한 부분에 대해서는 실제 경험을 소설로 옮긴 것이나 다름없다.

책을 1/3쯤 읽을 때쯤, 이런 내용에 위로를 얻었다는 과거의 내가 참 어이없었다. 그냥 다른 사람이 자기 정신병을 문학적 텍스트에 맞게 잘 가공해서 넣은 것뿐이잖아. 더 웃긴 것은 지금의 나도 책을 읽으면서 어느 정도의 위로를 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이상한 위로가 무엇에서 생기는 것인지 알아봐야 했다.

가장 신빙성 있으면서 제일 쓰레기 같은 생각은, ‘이런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구나’ 였다. 다 힘들게 산다는 종류의 위로가 아니었다. 내가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위로였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망상을 하지만 나는 상태가 안 좋았을 때 진지하게 그것들을 믿고는 했다. 사람들이 전부 나를 싫어한다는 생각 같은 것들. 신빙성이 하나도 없는 아이디어는 아니지만, 어쨌든 확신하기에는 아직 공백이 남아 있는 명제를 철썩같이 믿었다. 그러니까 이런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고 사는 사람이 나뿐이 아니었다는 게 위로가 되었던 것 같다. 정말 쓰레기같은 말 한 번 더 하면, 쟤보단 내가 나아 보였다.

두 번째로 쓰레기 같은 생각은, ‘어 나도 그런데’ 였다. 물론 PKD의 생애는 상당히 불행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 양반이 쓴 소설들을 보면 실제로도 꽤나 불행했을 거라고 짐작한다. 생활고, 마약 중독, 5번의 결혼과 이혼. 결혼을 5번이나 한 것으로 보아 연애 경험 0번인 나보다야 낫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꽤나 심각해보이는 PKD의 상태를 보고 약간의 동병상련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

인터넷을 뒤적거리다가 어떤 칼럼을 본 적이 있다. 현재 시행되고 있는 자살 예방 정책은 개인이 자신의 상태를 알리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고, 결국 정신질환자들을 더 고통스럽게 만든다는 내용이었다. 예를 들면 자살방조죄의 존재 때문에 아무에게도 자살 의사를 털어놓지 못한다거나, 자살 시도를 들키면 정신병동에 가기 때문에 시도 후에도 병원에 가지 않는다거나.

대신 칼럼에서는 정신질환자들이 안전하게 자신의 정신질환과 정신적 고난을 공유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지금의 사회적 통념과 대치되는 의견이었다. 현재는 의료인, 심지어 정신질환 당사자들까지도 환자 커뮤니티를 기피하는 경우가 많다. 환자들끼리 있으면 정신질환이 더욱 악화된다는 이유에서다.

내 경험상, 그런 커뮤니티는 다른 주제에 대해서도 에코 체임버의 성격이 강했던 것 같다. 일례로, 그런 커뮤니티에서 정치 이야기를 하면 생산적인 논의보다는 당파 싸움이나 일방적인 혐오로 흐르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에는 신념뿐만 아니라 감정도 반사되어 되돌아오기 마련이다. ‘정신질환자들끼리 모여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커뮤니티 구조 자체가’ 부정적인 감정 공유에 적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전혀 편하지 못한 커뮤니티다.

만약 정신질환자들이 정신적 고난을 편하게 공유할 수 있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내가 이상하거나 유별나거나 잘못된 사람이 아니라는 위로와, 서로를 향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지 않을까. 마치 내가 PKD의 소설을 보고 느꼈던 것처럼 말이다.

기존의 커뮤니티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이것이다. 실시간으로 우울을 ‘전시’함에 따라 생기는 피로와 증폭된 우울감과, 사회적 취약계층을 이용하려 하는 사람들의 등장이다. 어느 정도 우울감을 표출하는 데에 시간 텀을 두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민감정보 교환 혹은 1:1 대화를 막아두면 일차적인 방어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게 내 생각이다.

물론 이런 커뮤니티가 사람을 완전히 ‘고쳐놓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고쳐져야 할까?’ 약물의 도움을 받는다고 해도 누군가는 정신질환을 평생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고, 그런 사람에게 정신질환을 고쳐야 할 것으로 강요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정신질환을 자신의 일부로 ‘정체화’할 수 있는 권리 또한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추상적이고 이상적인 커뮤니티가 사람을 '고치지는' 못하더라도, 덜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가능할 것이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커뮤니티에 대해서는 아이디어를 던져놓은 수준이고, 아직 구체화는 멀었다고 생각한다.)

<발리스>를 읽다 보면 나 혼자만 미쳐있지는 않다는 걸 깨닫게 된다. 3년 전의 내가 ‘이런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게 어렴풋이 기억난다. 나만 그런 건 아니라는 감각. 이 책의 저자만큼은 아니더라도 다들 조금씩은 미쳐있다는 안도감. 따라서 이 글 역시 누군가에게는 편안한 거리에서 읽히는 고백이 되기를 바란다.

#에세이

우연한 기회로 학생자치를 했던 과거를 다시 돌아볼 기회가 생겼다. 단과대 학생회, 총학과 총동연에서 정신이 사나울 정도로 많은 활동을 했었다. 단과대 비대위장으로, 총학과 총동연에서 선거관리위원장으로, 총동연에서 재정감사위원장으로 활동했고, 단과대와 총동연의 회칙개정위원회에도 있었다. 최근에는 총동연 회장단 선거에서 선거운동본부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정말 사람이 없는 탓에 학생자치에서 출마 빼고 다 해봤다.

막상 내가 학생자치에서 중요하게 여기던 가치는 무엇일까? 첫 번째는 당연히 학우들과의 소통이었다. 단과대 비대위장으로 인준되었을 때, 단과대 학생들이 많은 동아리에서 아이디어를 듣기도 했고, 직접 학우들을 찾아가서 인터뷰를 하려다가 학과 대표들이 반발하기도 했었다. ‘요즘 학생회’의 대표적 행사인 간식행사도 최대한 소통 통로로 이용하려고 의견 폼을 작성하면 쿠키를 나누어주기도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작은 실천이지만, 그리고 고작 비대위였지만, 나는 이런 가치로 단체를 운영했다는 것이 후회되지는 않는다.

두 번째는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놀랐다. 나는 회칙 준수를 매우 중요한 가치로 여기고 있었다. 흔히 말하는 보수의 가치인 ‘질서’를 수호하고 있었던 셈이다. 나는 세칙을 어겼을 때 자발적으로 사과문을 작성했고, 권력을 가진 학우가 회칙을 어겼을 때 진심으로 화를 냈다. 스스로 약간은 급진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스스로를 들여다보니 많이 당혹스러웠다.

더 웃긴 것은, 학칙이나 법을 그렇게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는다는 것이다. 학우들 표현의 자유를 탄압한다면 학칙은 얼마든지 어겨도 된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그걸 어김으로써 받는 징계가 훈장이라면서. 법은 아직 감이 잘 오진 않지만, 기존 질서가 사회적 약자를 탄압한다면 ‘불법으로 투쟁’해도 된다 여겼다.

어째서 이런 차이가 생긴 것일까. 왜 회칙은 수호해야 할 가치였고, 학칙이나 법은 투쟁 대상이었을까.

의외로, 나의 학생자치 약력에서 답이 나왔다. 나는 학부 총학생회 중앙운영위원회, 단과대 회칙개정위원회와 총동연 회칙개정위원회에 소속된 경력이 있다. 회칙을 더 낫게 고치고자 하면 언제든지 발의를 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학부 총학생회칙은 그렇게 쉽게 수정되지는 않지만, 어쨌든 중앙운영위원회에 소속되어 있을 때에는 전학대회로 개정안을 발의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만일 내가 직책을 가지고 있지 않은 학우였다면 회칙 개정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총학생회 회세칙을 생각하면, 본회 회원 1/10의 서명을 받아야 전학대회로 발의가 가능하다. 1/10은 학부 총학생회장으로 출마하려 할 때 온 선본부원이 받아야 하는 서명 수다. 대의를 위임받지 않은 사람이, 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권력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 회칙 수정을 요구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학칙은 내가 바꾸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기에 반항했다. 회칙은 내가 바꾸는 게 가능해 보여서 순응했다. 이것이 사실 기득권의 나이브함이 아니라면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지 잘 모르겠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나 나름대로 진보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대의를 위임받아 권력을 가지는 순간 정말로 구조에 순응해버린 것 같다.

질서 수호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질서를 지키는 것이 중요할 때도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소수에게 불리한 질서가 있다면 수정이 필요하다. 그러나 예를 들어 자치회 선거시행세칙을 생각하면, 신중한 민주적 절차를 거쳐 만들어졌던 만큼 되도록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걱정하는 건, 어느 순간부터 무의식적으로 ‘나에게 유리한’ 질서만을 지키려 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부분에서다. 물론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어쩔 때는 스스로에게 족쇄를 걸 때도 있었다. 하지만 언제든지 나에게 유리한 질서만을 지키거나 새로 만들 수 있는 권력이 ‘주어진 상태’였다는 것이 찜찜하다. (그리고 실제로, 나는 동아리연합회의 총학 독립을 돕기 위해 단과대 비대위장으로 인준받았다. 겸사겸사 단과대 학생회 비대위를 살리기도 했지만, 어쨌든 총동연이 단과대에 주는 이득은 없었다.)

학생자치를 그만둔 다음에도 계속 이러한 강박을 가지고 있다. 어찌 보면 사회운동을 시작한 지금, 이런 감정을 갖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끊임없이 기존 질서에 대해 성찰하고 투쟁하고 반항해야 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회칙을 너무 소중하게 여기기만 했던 과거가 조금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나는 회칙을 사랑하기보다 회칙에 압박을 느꼈어야 한다. 학우들이 회칙 미준수로 나를 공격하거나, 회칙을 바꾸어달라 요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살아갔어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학우들이 조금이라도 탄압받고 있는 규칙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고쳤어야 했다.

문득 집회 및 시위의 자유도, 출판의 자유도 보장되지 않은 우리 학칙이 생각났다. 학교에서 집회는 신고제가 아니라 승인제이기 때문에, 비상계엄 당시 시국선언을 위해 중앙비대위장은 공문을 통해 학생처장으로부터 집회 승인을 받아야 했다. 이런 규칙은 대학본부의 편의를 봐주고 있음이 분명하다.

기득권의 편의를 위해 작동하는 질서라면 없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그 신념을 잊지 않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권력을 가지게 될 일은 정말 없다고 생각하지만, 작은 직책일지라도 다시 질서를 해석할 수 있는 위치를 갖게 된다면, 나는 그 질서를 지키는 사람보다는 질서로부터 의심받는 사람, 구성원들의 요구에 맞게 질서를 고쳐나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

#에세이

이번 학기 교양 수업의 주제는 AI와 토론이었다. AI가 토론의 퍼실리테이션(facilitation, 진행을 촉진하고 돕는 역할)을 맡아 '좋은 토론'을 구현하는 것이 최종 과제였다. 많은 조들이 주어진 과제를 따라 훌륭한 결과물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어떤 조는 이성적인 토론을 만들기 위해 AI가 주장에서 감정을 소거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또 어떤 조는 갈등을 드러냄과 동시에 타협안을 내놓기 위해, 의견이 가장 먼 사람들끼리 매칭시키는 AI를 만들었다.

우리 조는 '좋은 토론'을 서로 의견을 좁힐 수 있는 토론으로 설정하고, 타협안을 내놓는 AI를 설정했다. 나는 이 토론이 좋은 토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의견을 도저히 좁힐 수 없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조원들에게 미안하게도 더 좋은 생각이 나지 않아 그대로 진행하긴 했지만, 다른 생각이 났다면 그 아이디어로 밀고 갔을 것 같다.

솔직히 말하면, 다른 조의 결과물도 긍정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 AI는 이래서 안 되고, 저 AI는 이래서 안 되고...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모든 AI를 반대하고 있었고, 이것이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닌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냥 평범하게 AI가 싫은 것이 아닐까? 무조건적으로 AI를 반대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데 생각해보면 나는 애초부터 토론의 AI 개입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것 같다. 의사 결정을 위한 토론은 합의된 규칙에 의해 진행되어야 하고, 거기에 기계가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별 수 없다. 나는 더 나은 결과를 내놓는 토론이 무조건 좋은 토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민주적인' 토론이 좋은 토론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것이 내가 생각하는 '민주적' 토론인지는 뒤에서 다루겠다.

제시된 AI들을 보면 크게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AI가 토론의 구성원 혹은 의장이 되어 토론을 주재하는 형태이다. 다른 하나는 AI를 이용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형태이다. 두 사례는 명확히 구분하기 힘들 수 있지만 이번에는 나누어서 다루어본다.

AI는 토론의 구성원이 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로, 발언권과 의장 권한은 책임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AI가 의장을 수행하려면 자신의 발언에 대해 정치사회적 책임을 져야 하고, 필요하면 비판을 받거나 교체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AI의 발언에 문제가 생기면 그 책임은 개발자나 운영자가 지게 되고, AI 자신이 그 대상이 될 수 없다.

두 번째로, AI가 어떠한 행동을 하는 순간 그것은 일종의 '기준'이 되어버린다. AI가 하는 행동은 일반적으로 이성적이고 옳은 것으로 여겨지고, 에러가 발생해도 예외적 시스템 오류로 여겨지게 된다. 따라서 AI가 AI로 여겨진다면, 그 자체로 토론 구성원들 사이의 수평적 관계를 깨뜨리게 된다.

그렇다면 AI를 사용한 시스템은 어떨까. 이것 또한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오랜 시간 구성원들의 논쟁을 거쳐 만들어진 시스템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회법 같은 경우 무수한 갈등을 통해 압축되어 만들어진 정치적 산물이나, AI를 활용한 시스템의 경우 효율적이라고 판단되는 규칙을 일괄 적용하기 때문이다. AI 시스템을 의결 과정에 적용하는 것은 구성원이 제도 형성 과정에 참여할 권리를 박탈한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반박할 지점이 정말 많이 생각날 것이다. 의장이나 구성원으로 선출되어놓고 책임을 지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인간 전문가의 발언도 일종의 기준으로 적용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전체적으로 하고 싶은 말은, AI가 개입하는 순간 회의체의 정치적 책임이 흐려진다는 것이다. 당연히 사람들은 불완전하고 책임도 지지 않고 주관적이고 서툴다. 제도를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도 AI만큼 '당장 합리적이'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회의체의 선택이 틀렸을 때, 그 책임은 구성원 모두가 질 의무가 있다. 심지어 전문가가 틀렸을 때도 전문가와 그를 교차검증하지 않은 사람들이 지탄을 받는다.

그러나, AI가 개입하는 순간 정치적 책임은 기술의 설계 혹은 운영으로 옮겨간다. 회의체의 선택이 틀렸을 때 그들의 문제인지, AI의 문제인지 정확히 말할 수 없게 된다. 만일 AI를 이용한 토론이 잘못된 결과를 불러왔다면, 그것은 데이터의 문제일까, 운영자의 문제일까, 시스템 에러일까. 그저 LLM의 운이 안 좋았던 걸까, 혹은 AI를 너무 믿은 사람의 잘못일까.

민주주의라는 말은 사람에 따라 정의가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전적인 정의를 가져오면, '국민이 권력을 가지고 그 권력을 스스로 행사하는' '제도'이자 '정치사상'이다. 어찌 보면 상태라고도 할 수 있겠다. 구성원이 권력을 가진 상태, 그리고 그 권력을 스스로 행사하는 상태.

하지만 난 그걸 넘어, 구성원 모두가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는 상태가 민주주의의 핵심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선택의 주체가 분명히 구성원에게 있으며, 그에 대한 책임도 회의체가 지는 상태가 이상적인 민주주의라고 주장해본다. AI가 결정권이나 토론 구조에 개입한다면 결과에 관해 AI의 탓을 할 구성원이 단 한 명도 없어야 하며,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나는 AI를 토론 중재 혹은 구조에 개입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미 잘 쓰고 있는 회의록 작성용 AI나 발언 시간 관리 같은 건 논외다. 결정권, 토론 구조, 토론 규칙, 중재에 AI가 개입하는 순간 결론의 책임 소지는 흐려진다. 쉽게 생각해서, LLM이 틀린 정보를 알려줘서 과제 점수가 까였다면 나는 내가 아닌 LLM을 탓할 것 같다. 마찬가지로, AI가 개입한 토론에서 틀린 결론이 나왔다면, 아무리 외부의 비판이 거세도 구성원들은 모두 AI를 탓하지 않을까.

#에세이

울산시 청년정책 중 “미혼남녀 만남 프로그램”이 있다. ‘미혼남녀들을 대상으로 건전한 취미생활을 함께하면서 자연스러운 만남의 기회를 제공하고 커플 매칭을 통한 결혼친화 분위기 조성, 저출산 해소’. 울산시가 주도하는 소개팅 사업이라니, 얼추 보면 우습게 보이지만 그 이면은 결코 웃기지만은 않다. 결국 울산시에서 청년들의 이탈이 심해지고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그만큼 울산시의 청년이탈 상황은 심각하다. 특히 청년 여성의 이탈이 심각하다. 20대 남성의 순유출률은 0.7%이고, 20대 여성은 그 2배인 1.3%를 기록하고 있다. 인구 유출의 대부분은 수도권으로 이루어졌다. 유출 사유는 울산의 도시경쟁력, 주거환경, 일자리 능력 등이 있을 것이나, 울산에 거주 중인 청년 여성인 내가 경험하는 제일 큰 이유는 일자리 때문이다. 제조업 도시인 울산에서 여성의 제조업 종사비율은 36.3%로 낮은 편이고, 성별임금격차도 42.4%로 높은 편이다.

최근 2025 울산여성일자리박람회가 열렸다. 직접 둘러본 소감으로는 사무직, 생산직, 조리직, 간호직 등의 여성 위주 산업으로 부스를 채우려는 노력이 보였다. 그런데 그뿐이었다고 해야 할까. 옆에는 관광일자리페스타까지 같이 진행되어 행사의 규모가 커 보였지만, 실질적으로 여성 위주 산업 부스는 40개 남짓이었다. 게다가 박람회 이름에 여성이라고 박혀 있지만 남성도 자유롭게 일자리를 찾을 수 있다는 안내도 있었다. 이번 행사를 가서 나는 역설적으로 울산에 내 자리가 없을 것 같다고 느꼈다. 그 한계가 명확한 행사였다고 생각한다.

결국 울산에는 일자리가 정말 없고, 여성 위주의 일자리는 그보다도 더 없다. 제조업 위주의 도시인 울산에서는 여성 위주의 산업이 적다는 명백한 사실도 있다.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떠나는 것은 어찌 보면 필연적인 일일지도 모른다. 이를 울산시도 알고 있는지, 각종 취업지원 사업들을 청년정책으로 내세우고 있다. 자격증 응시료 지원사업, 면접 정장 대여사업, 대학생 아르바이트 사업 등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취업지원 사업들이 정말 울산에 청년을 잡아둘 수 있을지는 의문이 많다. 근본적으로 청년들의 이탈은 취업지원 부족이 아닌 일자리 부족, 청년 일자리 부족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청년 문제와 노동 문제는 깊이 얽혀 있다. 노동 문제 현안 해결 없이 청년 이탈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나는 울산이 좋지만, 가끔씩은 울산이 나를 쫓아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부디 울산이 '결혼친화' 도시가 아닌, '청년친화' '노동친화' 도시로서의 방향성을 택하길 바란다.

참고자료: http://www.ulsan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96427

https://www.ulsanpress.net/news/articleView.html?idxno=556327

https://www.yna.co.kr/view/AKR20230626112800530

청년 이탈 문제가 울산의 일만은 아니다: https://youtu.be/g4jY_o1JnoQ?si=vM4CDBwQ2vqJJcU_

#에세이

“학생단체 또는 학생이 신문, 학술지 등의 간행물을 정기 또는 부정기적으로 발행하려는 때, 또는 발간된 간행물을 배포하려는 때에는 총장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현재 내가 재학 중인 대학의 학칙 제94조는 대한민국 헌법 제21조에 위배된다.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지고, 언론·출판에 대한 허가나 검열과 집회·결사에 대한 허가는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학칙 제94조는 헌법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조항이자, 대학 본부의 권력을 학생자치 위에 군림하게 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조항은 그뿐만이 아니다. ‘학생활동에 관한 규정’에 따르면, 교내 생활단체가 교내 및 교외집회를 하기 위해서는 지도교수를 경유한 학생처장의 승인이 필요하다. 규정에서 쓰인 단어 변화도 흥미롭다. 2016년 전에는 “집회를 하려고 할 때”였으나, 이후 “집회를 하려면”으로 개정되어 문맥상 강제성을 더하기도 하였다.

또한 같은 규정에 따르면,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이하 ‘집시법’을 위반한 시위의 경우 학생처장이 집회를 해산시킬 수 있다. 해당 집회가 집시법을 위반하는지 학생처장이 알 방법이 전무한데 말이다. 집시법에 따르면 집회의 해산 권한은 관할 경찰서장에게 있다. 학생처장이 경찰서장에게 법적으로 어떠한 권리를 위임받지는 않은 것이 분명하다.

​재학 중인 대학의 학칙만이 학칙만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대학교 학칙은 학생들의 정치활동과 자치활동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 0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 국가인권위는 학생의 각종 활동에 학교 측 승인이 필요하다는 조항을 고칠 것을 여러 대학에 권고한 바가 있다. 그러나 국가인권위는 ‘권고’ 이상의 조처를 할 수 없고, 대부분의 대학에서 해당 조항은 고쳐지지 않고 있다.

일상적 계엄령이나 다름없는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고쳐나가야 하는가. 유신정권이 물러난 지 50년 이상이 지났는데 학칙에 남은 흔적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럴수록 권력에 저항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세상에 지지 말아요>라는 민중가요에는 “법과 권력이라는 폭력에 무너지지 마”라는 가사가 나온다. 학칙이라는 폭력에 무너지지 말자. 집회·결사·언론·출판의 자유를 지키자. 교내에서도 얼마든지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것처럼 행동하자. 실제로 우리에게는 헌법이 명시한 권리가 있다.

#에세이

퀴어 운동을 하다 보면 가끔 친구들이 질문을 합니다. 자신은 2D 캐릭터를 사랑하는데 왜 성소수자로 인정받지 못하냐고요. 솔직히 처음에는 혐오자들의 레파토리인 줄 알았는데, 더 이야기해보니 순수하게 궁금해하고 있더라고요. 저는 퀴어라는 것은 사회의 패러다임 속에서 형성된다고 말했습니다. 모든 사랑은 기본적으로 퀴어하나 사회에서는 2D 캐릭터를 향한 사랑을 성소수자라고 부르지 않는다고요. 그러자 돌아온 대답은 이것이었습니다. 본질적으로 정체성 정치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이 대답은 ‘정체성 정치는 나쁜 것’이라는 가정이 깔린 질문이었습니다. 정체성 정치에는 분명히 위험한 면이 있습니다. 당사자와 비당사자를 가르고, 결국에는 ‘당사자’들만 살아남는 구조이죠. 탈락한 당사자들은 당사자성을 인정받지 못합니다. 제일 대표적인 예시가 디지털 래디컬 페미니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성의 범위를 줄이고 축소시켜 기혼자 여성, 트랜스여성, 퀴어 여성들의 연대를 수락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쁜 예시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체성 정치에 강력한 점 또한 있습니다. 강한 단결을 만들어 사회적 가시화를 이루어내는 것 말입니다. 대표적으로 나는 퀴어이다, 나는 퀴어인 것이 자랑스럽다, 라고 외치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기 위해서라면 정체성이 본질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나는 태어나기를 레즈비언으로 태어났다, 와 같은 것이죠. 그래야 고정된 정체성이 타협 불가능한 본질임을 강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전환치료는 무용지물이자 폭력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이때, 정체성이 고정되어있다는 말은 퀴어 이론과는 어긋나 보입니다. 정체성이란 것은 사회의 패러다임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인데, 정체성 정치는 본질주의를 추구하니까요. 그러나 ‘실제로 그런 것’과 ‘그렇게 말하는 것’은 다릅니다. 다시 말해 전략적으로 본질주의를 이용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퀴어 이론을 이해할 수 없고, 이해를 강요해서도 안 되기 때문입니다.

퀴어 운동에서의 정체성 정치가 유효한 것과 별개로, 위험한 점이 많습니다. ‘진짜 퀴어’가 아니라고 배제당하는 퀴어들이죠. 예를 들어 무성애자가 받는 억압이 가짜라고 주장하거나, 이성을 사귀는 바이섹슈얼들에게 사실은 이성애자 아니었냐고 묻는 등의 일입니다. 정체성 정치를 무기로 쓰려면, 그 무기가 본인을 찌르지 않는지 보아야 합니다. 퀴어 운동을 위해서라면 끊임없이 방향성을 성찰하고 퀴어 커뮤니티 내부에서의 흐름을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비당사자의 배척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디지털 래디컬 페미니즘은 자주 남성의 여성의제 연대를 거부하고는 합니다. 이것 또한 정체성 정치의 어두운 면입니다. 그렇다면 퀴어 운동의 정체성 정치에서도 유사한 경험이 있지 않을까요? 퀴어는 아니지만 연대하고 싶은 사람은 정체성 정치의 현장에서 어디로 가야 할까요? 그럴 때 앨라이라는 이름이 빛을 발한다고 생각합니다. 연대자들에게도 정체성을 부여함으로서 일종의 ‘같은 편’으로 포섭하고, 연대자에게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환대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연대자가 의제에서 ‘비당사자’로 남지 않게 되죠.

정체성 정치에는 분명 위험이 따릅니다. 배제의 논리로 작동하는 일이 부지기수입니다. 하지만 정체성 정치는 외부로 내보일 때 강력하고, 가끔은 이 정치적 언어를 계속 사용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끊임없이 커뮤니티 내부를 점검하고, ‘앨라이’라는 연대자로서의 정체성을 부여해 타인을 환대해줄 수 있다면, 퀴어 운동이 조금은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에세이

“혹시 정치할 생각 있니?”

휴학 상담 때문에 교수님을 찾아뵙고 들은 말입니다. 올해 들은 말 중 제일 기억에 남는 말이었어요. ‘주문 피청구인 윤석열을 파면한다’보다 더 인상깊었습니다.

교수님 입장에서는 물어볼 만했다고 생각합니다. 학생회 일이 너무 바쁘고 힘들어서 휴학계를 내려고 했던 거니까요. 아마 연구에 흥미를 붙이지 못하고 정치를 하러 갈까 봐 우려가 되셨던 것 같습니다. 혹은 연구에도 재미를 붙이고, 정치에도 재미를 붙이거나요. 그게 조금 더 무섭죠.

저는 곧바로 아니라고 했습니다. 정치는 추호도 할 생각이 없다고 했어요. 물론 제 말은 ‘정당에서 어떤 직책도 맡지 않겠다’는 의미였습니다. 교수님께서 그 말을 어떻게 해석하셨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설마 아예 정치에 관심을 끌 거라고 생각하시진 않았겠죠.

관심을 끌 수가 없습니다. 이미 정치적인 존재니까요. 사람은 누구나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는 원론적인 이야기도 좋지만, 저는 오늘 이공계 내부의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과학은 정치와 관련 없어야 한다는 주장은 한참 거슬러 올라갑니다. 보일-홉스 논쟁부터 시작해, 과학은 ‘실험을 통해 중립적으로 생산된다’는 이미지가 주를 이루게 되죠. 과학은 정치로부터 독립적이라는 터무니없는 신화는 지금도 유지됩니다.

과학의 ‘탈정치화’는 과학계의 목소리가 정치에 닿지 못하게 함과 동시에, 과학계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정치를 지워버립니다. 대표적인 예시로 기업 과제가 있죠. 연구실은 기업으로부터 과제를 받아 원하는 결과를 내도록 연구를 수행합니다. 연구는 결국 자본주의적 이해관계 속에서 수행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얻어낸 데이터는 객관적일지 몰라도, 누가 자금을 대고, 어떻게 요약되는가에 따라 충분히 정치적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는 단순히 연구 결과에만 영향이 있는 것이 아닌, 연구실 내부의 문화와 권력관계에도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제가 경험한 연구실들에서는 정치를 언급하는 것이 ‘불편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이공계 특유의 ‘중립’ 분위기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이것이 과학의 탈정치와도 관련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정치적인 존재는 자신을 드러내기 더욱 어려워집니다. 대표적으로 예시를 꼽고 싶은 건 성소수자들입니다. 성 정체성과 지향성을 드러내는 것은 연구실에서는 ‘불필요한 정치’임과 동시에, ‘연구만 잘 하면 된다’는 말로 정체성이 지워집니다. 연구만 잘 하면 된다, 틀린 말이 아니죠. 그러나 존재 자체를 연구실 외의 문제로 취급해 버린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이 글을 읽으며 ‘그렇지만 정치는 정말 필요 없지 않나?’고 생각하시는 분들께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께서 정치를 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과학의 탈정치화는 결국 누구를 보호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나요.

교수님께 정치를 하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 말은 완전히 가능하지 않습니다. 정치가 배제된 것처럼 보이는 공간에서, 어떤 존재는 침묵 없이는 머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침묵을 요구하는 구조야말로, 과학이 여전히 정치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입니다.

이제는 침묵 없이 존재할 수 있는 과학을 상상해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그 첫걸음은, 존재를 문제 삼지 않고 말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2025.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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