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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universe we became

‘일신상의 이유’로 힘든 일이 닥칠 때마다 찾게 되는 것들이 있다. 달콤한 것들, 아주 매운 것들, 작년에 멘탈이 어려웠을 때 들었던 노래 등등 말이다. 요즘에도 힘든 일이 몇 가지 있어서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해봤는데 도저히 통하지가 않았다. 고민하다가, 또 고민하다가 3년 전 정말 힘들었을 때 읽던 소설을 꺼내보기로 했다. 제목은 <발리스>고, 작가의 이름은 PKD라는 약칭으로도 흔히 알려진 필립 K. 딕이다.

소설을 꺼내기까지 고민했던 이유는 이 양반이 20세기 중반의 미국 백인 남성이기 때문이었다. 3년 전에는 정치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사회운동가를 꿈꾸는 지금, 갑자기 소설에서 식민주의적인 단어를 마주하게 된다면 너무나 화가 날 것 같았다.

그럼에도 이 책을 꺼낸 이유는, 이전에 이 책을 읽었을 때 분명 ‘정신병 투성이인’ 내용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얻었던 기억이 있어서다. 그 이유를 메모해두지 않아서 잊어버린 나머지, 기억에만 의존해 물살을 가르는 연어마냥 3년 전으로 거슬러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래서 데이터 백업이 중요하다.

이제부터 <발리스>에 대해 주제넘고 선도 넘는 이야기를 해보겠다. 이 책은 잘 쳐주면 신비주의 SF라고 할 수 있겠으나, 솔직히 나는 이게 정신병 일지라고 생각했다. 과거의 내가 보나, 현재의 내가 보나 그 관점은 변하지 않았다. 줄거리를 보면 그 이유를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분신인 호스러버 팻은 분홍색 광선을 맞고 방대한 양의 정보를 접하고서는, 이를 설명할 ‘주해서’라는 책을 집필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이 비합리적인 세상에서 다시 태어나있을 구세주를 찾겠다며 여행을 떠나게 된다.

책 뒤편을 보면, 자살 시도나 정신병원 입원, 친구들과의 ‘주해서’ 토론은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라고 되어 있다. 즉 어떠한 부분에 대해서는 실제 경험을 소설로 옮긴 것이나 다름없다.

책을 1/3쯤 읽을 때쯤, 이런 내용에 위로를 얻었다는 과거의 내가 참 어이없었다. 그냥 다른 사람이 자기 정신병을 문학적 텍스트에 맞게 잘 가공해서 넣은 것뿐이잖아. 더 웃긴 것은 지금의 나도 책을 읽으면서 어느 정도의 위로를 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이상한 위로가 무엇에서 생기는 것인지 알아봐야 했다.

가장 신빙성 있으면서 제일 쓰레기 같은 생각은, ‘이런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구나’ 였다. 다 힘들게 산다는 종류의 위로가 아니었다. 내가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위로였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망상을 하지만 나는 상태가 안 좋았을 때 진지하게 그것들을 믿고는 했다. 사람들이 전부 나를 싫어한다는 생각 같은 것들. 신빙성이 하나도 없는 아이디어는 아니지만, 어쨌든 확신하기에는 아직 공백이 남아 있는 명제를 철썩같이 믿었다. 그러니까 이런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고 사는 사람이 나뿐이 아니었다는 게 위로가 되었던 것 같다. 정말 쓰레기같은 말 한 번 더 하면, 쟤보단 내가 나아 보였다.

두 번째로 쓰레기 같은 생각은, ‘어 나도 그런데’ 였다. 물론 PKD의 생애는 상당히 불행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 양반이 쓴 소설들을 보면 실제로도 꽤나 불행했을 거라고 짐작한다. 생활고, 마약 중독, 5번의 결혼과 이혼. 결혼을 5번이나 한 것으로 보아 연애 경험 0번인 나보다야 낫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꽤나 심각해보이는 PKD의 상태를 보고 약간의 동병상련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

인터넷을 뒤적거리다가 어떤 칼럼을 본 적이 있다. 현재 시행되고 있는 자살 예방 정책은 개인이 자신의 상태를 알리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고, 결국 정신질환자들을 더 고통스럽게 만든다는 내용이었다. 예를 들면 자살방조죄의 존재 때문에 아무에게도 자살 의사를 털어놓지 못한다거나, 자살 시도를 들키면 정신병동에 가기 때문에 시도 후에도 병원에 가지 않는다거나.

대신 칼럼에서는 정신질환자들이 안전하게 자신의 정신질환과 정신적 고난을 공유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지금의 사회적 통념과 대치되는 의견이었다. 현재는 의료인, 심지어 정신질환 당사자들까지도 환자 커뮤니티를 기피하는 경우가 많다. 환자들끼리 있으면 정신질환이 더욱 악화된다는 이유에서다.

내 경험상, 그런 커뮤니티는 다른 주제에 대해서도 에코 체임버의 성격이 강했던 것 같다. 일례로, 그런 커뮤니티에서 정치 이야기를 하면 생산적인 논의보다는 당파 싸움이나 일방적인 혐오로 흐르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에는 신념뿐만 아니라 감정도 반사되어 되돌아오기 마련이다. ‘정신질환자들끼리 모여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커뮤니티 구조 자체가’ 부정적인 감정 공유에 적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전혀 편하지 못한 커뮤니티다.

만약 정신질환자들이 정신적 고난을 편하게 공유할 수 있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내가 이상하거나 유별나거나 잘못된 사람이 아니라는 위로와, 서로를 향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지 않을까. 마치 내가 PKD의 소설을 보고 느꼈던 것처럼 말이다.

기존의 커뮤니티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이것이다. 실시간으로 우울을 ‘전시’함에 따라 생기는 피로와 증폭된 우울감과, 사회적 취약계층을 이용하려 하는 사람들의 등장이다. 어느 정도 우울감을 표출하는 데에 시간 텀을 두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민감정보 교환 혹은 1:1 대화를 막아두면 일차적인 방어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게 내 생각이다.

물론 이런 커뮤니티가 사람을 완전히 ‘고쳐놓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고쳐져야 할까?’ 약물의 도움을 받는다고 해도 누군가는 정신질환을 평생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고, 그런 사람에게 정신질환을 고쳐야 할 것으로 강요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정신질환을 자신의 일부로 ‘정체화’할 수 있는 권리 또한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추상적이고 이상적인 커뮤니티가 사람을 '고치지는' 못하더라도, 덜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가능할 것이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커뮤니티에 대해서는 아이디어를 던져놓은 수준이고, 아직 구체화는 멀었다고 생각한다.)

<발리스>를 읽다 보면 나 혼자만 미쳐있지는 않다는 걸 깨닫게 된다. 3년 전의 내가 ‘이런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게 어렴풋이 기억난다. 나만 그런 건 아니라는 감각. 이 책의 저자만큼은 아니더라도 다들 조금씩은 미쳐있다는 안도감. 따라서 이 글 역시 누군가에게는 편안한 거리에서 읽히는 고백이 되기를 바란다.

#에세이

우연한 기회로 학생자치를 했던 과거를 다시 돌아볼 기회가 생겼다. 단과대 학생회, 총학과 총동연에서 정신이 사나울 정도로 많은 활동을 했었다. 단과대 비대위장으로, 총학과 총동연에서 선거관리위원장으로, 총동연에서 재정감사위원장으로 활동했고, 단과대와 총동연의 회칙개정위원회에도 있었다. 최근에는 총동연 회장단 선거에서 선거운동본부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정말 사람이 없는 탓에 학생자치에서 출마 빼고 다 해봤다.

막상 내가 학생자치에서 중요하게 여기던 가치는 무엇일까? 첫 번째는 당연히 학우들과의 소통이었다. 단과대 비대위장으로 인준되었을 때, 단과대 학생들이 많은 동아리에서 아이디어를 듣기도 했고, 직접 학우들을 찾아가서 인터뷰를 하려다가 학과 대표들이 반발하기도 했었다. ‘요즘 학생회’의 대표적 행사인 간식행사도 최대한 소통 통로로 이용하려고 의견 폼을 작성하면 쿠키를 나누어주기도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작은 실천이지만, 그리고 고작 비대위였지만, 나는 이런 가치로 단체를 운영했다는 것이 후회되지는 않는다.

두 번째는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놀랐다. 나는 회칙 준수를 매우 중요한 가치로 여기고 있었다. 흔히 말하는 보수의 가치인 ‘질서’를 수호하고 있었던 셈이다. 나는 세칙을 어겼을 때 자발적으로 사과문을 작성했고, 권력을 가진 학우가 회칙을 어겼을 때 진심으로 화를 냈다. 스스로 약간은 급진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스스로를 들여다보니 많이 당혹스러웠다.

더 웃긴 것은, 학칙이나 법을 그렇게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는다는 것이다. 학우들 표현의 자유를 탄압한다면 학칙은 얼마든지 어겨도 된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그걸 어김으로써 받는 징계가 훈장이라면서. 법은 아직 감이 잘 오진 않지만, 기존 질서가 사회적 약자를 탄압한다면 ‘불법으로 투쟁’해도 된다 여겼다.

어째서 이런 차이가 생긴 것일까. 왜 회칙은 수호해야 할 가치였고, 학칙이나 법은 투쟁 대상이었을까.

의외로, 나의 학생자치 약력에서 답이 나왔다. 나는 학부 총학생회 중앙운영위원회, 단과대 회칙개정위원회와 총동연 회칙개정위원회에 소속된 경력이 있다. 회칙을 더 낫게 고치고자 하면 언제든지 발의를 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학부 총학생회칙은 그렇게 쉽게 수정되지는 않지만, 어쨌든 중앙운영위원회에 소속되어 있을 때에는 전학대회로 개정안을 발의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만일 내가 직책을 가지고 있지 않은 학우였다면 회칙 개정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총학생회 회세칙을 생각하면, 본회 회원 1/10의 서명을 받아야 전학대회로 발의가 가능하다. 1/10은 학부 총학생회장으로 출마하려 할 때 온 선본부원이 받아야 하는 서명 수다. 대의를 위임받지 않은 사람이, 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권력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 회칙 수정을 요구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학칙은 내가 바꾸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기에 반항했다. 회칙은 내가 바꾸는 게 가능해 보여서 순응했다. 이것이 사실 기득권의 나이브함이 아니라면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지 잘 모르겠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나 나름대로 진보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대의를 위임받아 권력을 가지는 순간 정말로 구조에 순응해버린 것 같다.

질서 수호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질서를 지키는 것이 중요할 때도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소수에게 불리한 질서가 있다면 수정이 필요하다. 그러나 예를 들어 자치회 선거시행세칙을 생각하면, 신중한 민주적 절차를 거쳐 만들어졌던 만큼 되도록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걱정하는 건, 어느 순간부터 무의식적으로 ‘나에게 유리한’ 질서만을 지키려 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부분에서다. 물론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어쩔 때는 스스로에게 족쇄를 걸 때도 있었다. 하지만 언제든지 나에게 유리한 질서만을 지키거나 새로 만들 수 있는 권력이 ‘주어진 상태’였다는 것이 찜찜하다. (그리고 실제로, 나는 동아리연합회의 총학 독립을 돕기 위해 단과대 비대위장으로 인준받았다. 겸사겸사 단과대 학생회 비대위를 살리기도 했지만, 어쨌든 총동연이 단과대에 주는 이득은 없었다.)

학생자치를 그만둔 다음에도 계속 이러한 강박을 가지고 있다. 어찌 보면 사회운동을 시작한 지금, 이런 감정을 갖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끊임없이 기존 질서에 대해 성찰하고 투쟁하고 반항해야 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회칙을 너무 소중하게 여기기만 했던 과거가 조금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나는 회칙을 사랑하기보다 회칙에 압박을 느꼈어야 한다. 학우들이 회칙 미준수로 나를 공격하거나, 회칙을 바꾸어달라 요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살아갔어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학우들이 조금이라도 탄압받고 있는 규칙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고쳤어야 했다.

문득 집회 및 시위의 자유도, 출판의 자유도 보장되지 않은 우리 학칙이 생각났다. 학교에서 집회는 신고제가 아니라 승인제이기 때문에, 비상계엄 당시 시국선언을 위해 중앙비대위장은 공문을 통해 학생처장으로부터 집회 승인을 받아야 했다. 이런 규칙은 대학본부의 편의를 봐주고 있음이 분명하다.

기득권의 편의를 위해 작동하는 질서라면 없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그 신념을 잊지 않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권력을 가지게 될 일은 정말 없다고 생각하지만, 작은 직책일지라도 다시 질서를 해석할 수 있는 위치를 갖게 된다면, 나는 그 질서를 지키는 사람보다는 질서로부터 의심받는 사람, 구성원들의 요구에 맞게 질서를 고쳐나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

#에세이

이번 학기 교양 수업의 주제는 AI와 토론이었다. AI가 토론의 퍼실리테이션(facilitation, 진행을 촉진하고 돕는 역할)을 맡아 '좋은 토론'을 구현하는 것이 최종 과제였다. 많은 조들이 주어진 과제를 따라 훌륭한 결과물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어떤 조는 이성적인 토론을 만들기 위해 AI가 주장에서 감정을 소거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또 어떤 조는 갈등을 드러냄과 동시에 타협안을 내놓기 위해, 의견이 가장 먼 사람들끼리 매칭시키는 AI를 만들었다.

우리 조는 '좋은 토론'을 서로 의견을 좁힐 수 있는 토론으로 설정하고, 타협안을 내놓는 AI를 설정했다. 나는 이 토론이 좋은 토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의견을 도저히 좁힐 수 없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조원들에게 미안하게도 더 좋은 생각이 나지 않아 그대로 진행하긴 했지만, 다른 생각이 났다면 그 아이디어로 밀고 갔을 것 같다.

솔직히 말하면, 다른 조의 결과물도 긍정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 AI는 이래서 안 되고, 저 AI는 이래서 안 되고...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모든 AI를 반대하고 있었고, 이것이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닌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냥 평범하게 AI가 싫은 것이 아닐까? 무조건적으로 AI를 반대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데 생각해보면 나는 애초부터 토론의 AI 개입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것 같다. 의사 결정을 위한 토론은 합의된 규칙에 의해 진행되어야 하고, 거기에 기계가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별 수 없다. 나는 더 나은 결과를 내놓는 토론이 무조건 좋은 토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민주적인' 토론이 좋은 토론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것이 내가 생각하는 '민주적' 토론인지는 뒤에서 다루겠다.

제시된 AI들을 보면 크게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AI가 토론의 구성원 혹은 의장이 되어 토론을 주재하는 형태이다. 다른 하나는 AI를 이용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형태이다. 두 사례는 명확히 구분하기 힘들 수 있지만 이번에는 나누어서 다루어본다.

AI는 토론의 구성원이 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로, 발언권과 의장 권한은 책임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AI가 의장을 수행하려면 자신의 발언에 대해 정치사회적 책임을 져야 하고, 필요하면 비판을 받거나 교체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AI의 발언에 문제가 생기면 그 책임은 개발자나 운영자가 지게 되고, AI 자신이 그 대상이 될 수 없다.

두 번째로, AI가 어떠한 행동을 하는 순간 그것은 일종의 '기준'이 되어버린다. AI가 하는 행동은 일반적으로 이성적이고 옳은 것으로 여겨지고, 에러가 발생해도 예외적 시스템 오류로 여겨지게 된다. 따라서 AI가 AI로 여겨진다면, 그 자체로 토론 구성원들 사이의 수평적 관계를 깨뜨리게 된다.

그렇다면 AI를 사용한 시스템은 어떨까. 이것 또한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오랜 시간 구성원들의 논쟁을 거쳐 만들어진 시스템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회법 같은 경우 무수한 갈등을 통해 압축되어 만들어진 정치적 산물이나, AI를 활용한 시스템의 경우 효율적이라고 판단되는 규칙을 일괄 적용하기 때문이다. AI 시스템을 의결 과정에 적용하는 것은 구성원이 제도 형성 과정에 참여할 권리를 박탈한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반박할 지점이 정말 많이 생각날 것이다. 의장이나 구성원으로 선출되어놓고 책임을 지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인간 전문가의 발언도 일종의 기준으로 적용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전체적으로 하고 싶은 말은, AI가 개입하는 순간 회의체의 정치적 책임이 흐려진다는 것이다. 당연히 사람들은 불완전하고 책임도 지지 않고 주관적이고 서툴다. 제도를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도 AI만큼 '당장 합리적이'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회의체의 선택이 틀렸을 때, 그 책임은 구성원 모두가 질 의무가 있다. 심지어 전문가가 틀렸을 때도 전문가와 그를 교차검증하지 않은 사람들이 지탄을 받는다.

그러나, AI가 개입하는 순간 정치적 책임은 기술의 설계 혹은 운영으로 옮겨간다. 회의체의 선택이 틀렸을 때 그들의 문제인지, AI의 문제인지 정확히 말할 수 없게 된다. 만일 AI를 이용한 토론이 잘못된 결과를 불러왔다면, 그것은 데이터의 문제일까, 운영자의 문제일까, 시스템 에러일까. 그저 LLM의 운이 안 좋았던 걸까, 혹은 AI를 너무 믿은 사람의 잘못일까.

민주주의라는 말은 사람에 따라 정의가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전적인 정의를 가져오면, '국민이 권력을 가지고 그 권력을 스스로 행사하는' '제도'이자 '정치사상'이다. 어찌 보면 상태라고도 할 수 있겠다. 구성원이 권력을 가진 상태, 그리고 그 권력을 스스로 행사하는 상태.

하지만 난 그걸 넘어, 구성원 모두가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는 상태가 민주주의의 핵심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선택의 주체가 분명히 구성원에게 있으며, 그에 대한 책임도 회의체가 지는 상태가 이상적인 민주주의라고 주장해본다. AI가 결정권이나 토론 구조에 개입한다면 결과에 관해 AI의 탓을 할 구성원이 단 한 명도 없어야 하며,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나는 AI를 토론 중재 혹은 구조에 개입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미 잘 쓰고 있는 회의록 작성용 AI나 발언 시간 관리 같은 건 논외다. 결정권, 토론 구조, 토론 규칙, 중재에 AI가 개입하는 순간 결론의 책임 소지는 흐려진다. 쉽게 생각해서, LLM이 틀린 정보를 알려줘서 과제 점수가 까였다면 나는 내가 아닌 LLM을 탓할 것 같다. 마찬가지로, AI가 개입한 토론에서 틀린 결론이 나왔다면, 아무리 외부의 비판이 거세도 구성원들은 모두 AI를 탓하지 않을까.

#에세이

활동을 하다 보면 가끔 학생회에 대한 욕을 듣는다. 탈정치화되어 운동적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다는 이유이다. 나도 자주 공감하고 함께 그 경향성을 욕하지만, 그럴 때마다 찝찝함은 남아있었다. 그 이유를 더듬어 생각해보니, 너무 당연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직 학생사회를 좋아하는 것 같다. 매일같이 총학생회를 비판하지만, 그건 회장이 총학생회 운영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대표직에 1년 반 정도 있었던 단과대 학생회는 후임의 후임에게도 인수인계를 직접 해줄 정도로 좋아한다. 총동아리연합회는 말해 뭐해, 사랑한다.

회장에 반대하지만 총학생회가 좋다는 걸까. 마치 대통령을 욕하지만 애국심이 넘치는 사례로 비교해보니, 그런 지점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내가 좋아하는 학생회는 무엇일까. 나에게 학생사회는 무엇일까.

학생회가 이제는 운동적 기능은 하지 못하지만, 자치적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좋아한다. 결국 '자치'인 것이다. 그러니까 학생회가 좋다기보다는 학생사회가 좋은 것 같다. 계엄 며칠 후 학생총회를 빛내준 학우들이 좋다. 선거에 꼬박꼬박 관심을 가져주는 학우들이 좋다. 대부분이 선거에서 무비판적 찬성표를 던진다는 점에서는 아쉽지만 말이다.

결론적으로 학생사회를 이루는 학우들이 좋다. 학우들이 더 편하게 지냈으면 좋겠고, 학우들의 의견 하나하나가 소중하니 학생회나 대학본부의 정책에 잘 반영되길 바라고, 학생회가 대학본부로부터 학우들을 지켰으면 좋겠다.

문득 이런 정신이 운동에도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나 살자고 시작한 학생회가 학우들을 통해 '우리 살자'가 되고, 결국 이제는 노동자 민중들 '다 살자'가 되었다. 그토록 강조하던 애민정신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이해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가 좋아했던 학생사회는 정회원들 전부였다. 그러니까 이제는 이 세상의 정회원인 민중들을 좋아해보자. 너무 전체주의적인가.

#일기

울산시 청년정책 중 “미혼남녀 만남 프로그램”이 있다. ‘미혼남녀들을 대상으로 건전한 취미생활을 함께하면서 자연스러운 만남의 기회를 제공하고 커플 매칭을 통한 결혼친화 분위기 조성, 저출산 해소’. 울산시가 주도하는 소개팅 사업이라니, 얼추 보면 우습게 보이지만 그 이면은 결코 웃기지만은 않다. 결국 울산시에서 청년들의 이탈이 심해지고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그만큼 울산시의 청년이탈 상황은 심각하다. 특히 청년 여성의 이탈이 심각하다. 20대 남성의 순유출률은 0.7%이고, 20대 여성은 그 2배인 1.3%를 기록하고 있다. 인구 유출의 대부분은 수도권으로 이루어졌다. 유출 사유는 울산의 도시경쟁력, 주거환경, 일자리 능력 등이 있을 것이나, 울산에 거주 중인 청년 여성인 내가 경험하는 제일 큰 이유는 일자리 때문이다. 제조업 도시인 울산에서 여성의 제조업 종사비율은 36.3%로 낮은 편이고, 성별임금격차도 42.4%로 높은 편이다.

최근 2025 울산여성일자리박람회가 열렸다. 직접 둘러본 소감으로는 사무직, 생산직, 조리직, 간호직 등의 여성 위주 산업으로 부스를 채우려는 노력이 보였다. 그런데 그뿐이었다고 해야 할까. 옆에는 관광일자리페스타까지 같이 진행되어 행사의 규모가 커 보였지만, 실질적으로 여성 위주 산업 부스는 40개 남짓이었다. 게다가 박람회 이름에 여성이라고 박혀 있지만 남성도 자유롭게 일자리를 찾을 수 있다는 안내도 있었다. 이번 행사를 가서 나는 역설적으로 울산에 내 자리가 없을 것 같다고 느꼈다. 그 한계가 명확한 행사였다고 생각한다.

결국 울산에는 일자리가 정말 없고, 여성 위주의 일자리는 그보다도 더 없다. 제조업 위주의 도시인 울산에서는 여성 위주의 산업이 적다는 명백한 사실도 있다.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떠나는 것은 어찌 보면 필연적인 일일지도 모른다. 이를 울산시도 알고 있는지, 각종 취업지원 사업들을 청년정책으로 내세우고 있다. 자격증 응시료 지원사업, 면접 정장 대여사업, 대학생 아르바이트 사업 등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취업지원 사업들이 정말 울산에 청년을 잡아둘 수 있을지는 의문이 많다. 근본적으로 청년들의 이탈은 취업지원 부족이 아닌 일자리 부족, 청년 일자리 부족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청년 문제와 노동 문제는 깊이 얽혀 있다. 노동 문제 현안 해결 없이 청년 이탈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나는 울산이 좋지만, 가끔씩은 울산이 나를 쫓아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부디 울산이 '결혼친화' 도시가 아닌, '청년친화' '노동친화' 도시로서의 방향성을 택하길 바란다.

참고자료: http://www.ulsan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96427

https://www.ulsanpress.net/news/articleView.html?idxno=556327

https://www.yna.co.kr/view/AKR20230626112800530

청년 이탈 문제가 울산의 일만은 아니다: https://youtu.be/g4jY_o1JnoQ?si=vM4CDBwQ2vqJJcU_

#에세이

[스포 매우 많음]

창비가 마케팅을 잘못했다고 생각한다. 운동권에 가해진 국가폭력이 포함된 책인데, 아 활동가들이 읽으면 참 좋을 것 같은데, 그런데 홍보를 간첩할머니와 도끼청소년 이런식으로 했다... 나도 멜라작가님 아니었으면 책 안 읽었을 것 같은데, 다행히도 읽고 죽지 않았다.

처음에는 청소년과 할머니의 동거일기인 줄로만 알았는데, 책에 학생 운동권이 나올 줄은 진심 몰랐다. 2장 중간즈음에 결국 국가폭력 때문에 투신하는데, 내 맘도 찢겼다. 그러니까 이게 소설이라서가 아니라 실제로 많이 죽었고 많이 갇혔으니까.

없는 존재인 사귀자와 아세로라는 없는 존재답게 손을 맞잡지 못하고 서로 모르는 것도 많은 상태로 서로의 동거인으로 남는다. 심지어 할머니와 손녀 관계인데도 가족보다는 동거인에 가깝다는 점이 정말 좋았다. 그냥 서로가 서로에게 이방인인거지. 멜라답지 않은데 멜라다워서 좋다.

여담으로, 책 마지막에 작가의 말에 조국통일이 소원인 삼촌을 신기해했다는 회고가 나오는데, 그냥 나 아는 사람들 같아서 웃겼다.

아무튼 믿고 읽는 멜라작가님!

#독서록

“학생단체 또는 학생이 신문, 학술지 등의 간행물을 정기 또는 부정기적으로 발행하려는 때, 또는 발간된 간행물을 배포하려는 때에는 총장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현재 내가 재학 중인 대학의 학칙 제94조는 대한민국 헌법 제21조에 위배된다.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지고, 언론·출판에 대한 허가나 검열과 집회·결사에 대한 허가는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학칙 제94조는 헌법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조항이자, 대학 본부의 권력을 학생자치 위에 군림하게 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조항은 그뿐만이 아니다. ‘학생활동에 관한 규정’에 따르면, 교내 생활단체가 교내 및 교외집회를 하기 위해서는 지도교수를 경유한 학생처장의 승인이 필요하다. 규정에서 쓰인 단어 변화도 흥미롭다. 2016년 전에는 “집회를 하려고 할 때”였으나, 이후 “집회를 하려면”으로 개정되어 문맥상 강제성을 더하기도 하였다.

또한 같은 규정에 따르면,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이하 ‘집시법’을 위반한 시위의 경우 학생처장이 집회를 해산시킬 수 있다. 해당 집회가 집시법을 위반하는지 학생처장이 알 방법이 전무한데 말이다. 집시법에 따르면 집회의 해산 권한은 관할 경찰서장에게 있다. 학생처장이 경찰서장에게 법적으로 어떠한 권리를 위임받지는 않은 것이 분명하다.

​재학 중인 대학의 학칙만이 학칙만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대학교 학칙은 학생들의 정치활동과 자치활동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 0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 국가인권위는 학생의 각종 활동에 학교 측 승인이 필요하다는 조항을 고칠 것을 여러 대학에 권고한 바가 있다. 그러나 국가인권위는 ‘권고’ 이상의 조처를 할 수 없고, 대부분의 대학에서 해당 조항은 고쳐지지 않고 있다.

일상적 계엄령이나 다름없는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고쳐나가야 하는가. 유신정권이 물러난 지 50년 이상이 지났는데 학칙에 남은 흔적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럴수록 권력에 저항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세상에 지지 말아요>라는 민중가요에는 “법과 권력이라는 폭력에 무너지지 마”라는 가사가 나온다. 학칙이라는 폭력에 무너지지 말자. 집회·결사·언론·출판의 자유를 지키자. 교내에서도 얼마든지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것처럼 행동하자. 실제로 우리에게는 헌법이 명시한 권리가 있다.

#에세이

와인을 좋아하는 사회주의자의 유쾌한 에세이이다. 세상의 이데올로기와 불화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엄청나게 아프고 답답한 글을 써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전에 정당에서 <자본론> 강의를 들은 적 있었는데 그때 구매한 책이라서 자본론 내용이 많으려나 싶었다. 그런데 정말 사람 사는 이야기였고, 오히려 그래서 더 좋았던 것 같다.​

가장 충격받았던 건 2015년에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을 읽고 함께 토론했다는 이유로 학생 운동가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 책은 유명한 고전 경제저서를 리뷰한 권장도서인데도. 나도 사실 이번 사회과학 소모임에서 마르크스주의 공부를 해볼까 생각중이었어서 더 충격적이었던 것 같다. 국가보안법이 이렇게나 시대착오적이라는 걸 다시금 느끼게 했다. 제발 국가보안법 폐지하라.

보통 좌파로 산다고 하면 친구들이 노동자가 어떻고 자본가가 어떻고 하는 질문을 하는데, 초보라서 헷갈릴 때마다 멍하니 있고는 한다. 이 책을 읽고 확고한 자신만의 생각이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그 질문에 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좋았던 걸 하나 더 꼽으라면 특정 분파의 욕이 없어서. 그러니까 사회주의자 사이에서도 많은 종류가 있고 늘 서로 싸우기 마련이었던 것 같은데, 이 책은 싸움의 가능성을 조금 없애고 낸 것 같아서 좋았다. 누구든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 좋아요.

#독서록

오늘 독서모임에서 무한경쟁사회 이야기를 했다. 그중에서도 <현시창>이라는 책을 위주로 얘기했는데, 카이스트 자살 사건이 한창 가시화되었을 때의 글을 읽고, 각자의 경험을 풀어놓는 시간이 있었다.

요즘에는 대학에서 자살 사건이 일어나도 크게 소란이 일지 않는 느낌이다. 내가 아는 교내 자살 사건만 해도 여럿 있는데 모두 묻혔다. 성적 때문에 장학금을 잘렸다 말하면 돌아오는 것은 비난 뿐이다. 나는 성적 장학금 때문에 휴학한 경험이 있다. 다들 무한경쟁사회에 익숙해져 가는 건가. 씁쓸하다.

무한경쟁사회는 결국 좋은 직장, 안정적인 직장을 구해야 하는 현실과 맞물리는 것만 같다. 조금만 경쟁에서 다른 궤도를 타도 바로 쓸데없는 경력 취급이니까. 그런 점이 슬펐던 것 같다. 아마 중학교 때 이런 이야기를 봤으면 좋은 학교 얘기를 했을 거다. 영원히 경쟁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야기를 다 나누고 보니, 왜 하필 ‘카이스트’였을까 싶다. 왜 카이스트에서 무한경쟁사회의 가시화가 시작되었을까. 명문대 사람들도 경쟁에 억눌려 지낸다는 사실에 어째서 사람들은 놀랄까. 추측하기로는 무한경쟁사회에서 ‘승리’한 사람들도 무한경쟁사회의 피해자라는 사실에 놀라는 게 아닐까 싶다.

명문대에서의 사회문제와 투쟁이 먼저 가시화되는 것은 확실히 씁쓸한 문제이다. 분명 경쟁사회에서 승리했다고 여겨지는 자들의 투쟁이기 때문에 조명하는 면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투쟁은 가짜가 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어떠한 사람도 무한경쟁사회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이와 떼놓지 못하는 담론이 하나 있다. SNS에서 대치키즈 플로우가 돈 적이 있다. 대치키즈들이 피해자성을 주장할때의 논점이 '무한경쟁사회'에 있는데도 계속해 ‘상위 계급’이라는 이유로 피해자성을 주장할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계급사회는 계급사회대로 규탄할 수 있고 무한경쟁사회는 그것대로 규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계급 비판과 신자유주의 비판을 동시에 할 수 있다. 대치키즈들이 특혜를 받았다는 것과 동시에 경쟁사회의 피해자임을 인정해야 한다. 동시에 다양한 사람들의 경쟁사회에 대해서도 들어봐야 한다. 마이크를 조금 더 넓게 쥐어주어야 한다. 장기적으로는 ‘명문대 학우의 자살 사건’이 아니라, ‘다양한 청년들이 느끼는 무한경쟁사회의 문제점’을 파헤쳐야 한다.

독서모임에서 다른 이야기를 훨씬 많이 했던 것 같은데, 느낀 점이 조금 다른 포인트인 것 같다. 혹시 얘기를 충분히 듣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있다. 다음번에는 독서모임에서도 메모하면서 이야기를 들어봐야겠다.

#일기

지역 여성회에서 빌린 책이다. 내 명의로 빌린 게 아니기에 후딱 읽어버렸다. 총 200페이지가 조금 넘는 간략한 책이다.

책을 읽기 전까지는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규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책에서 '종북 세력' 이라는 단어가 나오니까 생각이 조금 달라지더라.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국가보안법의 존재를 생각하니, 무조건적인 규제가 옳지만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표현의 자유는 본래 소수자들을 위한 것이기에, 그것을 제한하는 것이 근본적 해결책이 되지는 못한다는 게 책의 설명이었다. <말이 칼이 될 때>에서는 지지하는 규제가 필요하다고 한다. 예를 들어 모임에서 자체적으로 혐오표현을 금지하는 내규를 만든다든지, 교육 등에서 소수자들의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식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지지선언을 하고, 교육에서 혐오표현 근절을 위해 힘쓰는 방향성은 좋다고 생각한다.

사실 차별금지법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는 책이기도 했는데, 책이 2018년에 쓰인 걸 보고 너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2025년에도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지 않고 있다니. 말도 안 된다 정말로. 어서 국가인권위원회가 컨트롤타워 역할을 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지금 인권위 돌아가는 걸 보면 애초에 그러지 못할 것 같지만.)

혐오표현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한번 정립할 수 있는 책이었다. 혐오표현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 손에 들려주면 좋은 책일 것 같다.

#독서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