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ce

the universe we became

와인을 좋아하는 사회주의자의 유쾌한 에세이이다. 세상의 이데올로기와 불화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엄청나게 아프고 답답한 글을 써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전에 정당에서 <자본론> 강의를 들은 적 있었는데 그때 구매한 책이라서 자본론 내용이 많으려나 싶었다. 그런데 정말 사람 사는 이야기였고, 오히려 그래서 더 좋았던 것 같다.​

가장 충격받았던 건 2015년에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을 읽고 함께 토론했다는 이유로 학생 운동가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 책은 유명한 고전 경제저서를 리뷰한 권장도서인데도. 나도 사실 이번 사회과학 소모임에서 마르크스주의 공부를 해볼까 생각중이었어서 더 충격적이었던 것 같다. 국가보안법이 이렇게나 시대착오적이라는 걸 다시금 느끼게 했다. 제발 국가보안법 폐지하라.

보통 좌파로 산다고 하면 친구들이 노동자가 어떻고 자본가가 어떻고 하는 질문을 하는데, 초보라서 헷갈릴 때마다 멍하니 있고는 한다. 이 책을 읽고 확고한 자신만의 생각이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그 질문에 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 좋았던 거 2. 특정 분파의 욕이 없어서… 그러니까 사회주의자 사이에서도 많은 종류가 있고 늘 서로 싸우기 마련이었던 것 같은데, 이 책은 싸움의 가능성을 조금 없애고 낸 것 같아서 좋았다. 누구든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 좋아요.

오늘 독서모임에서 무한경쟁사회 이야기를 했다. 그중에서도 <현시창>이라는 책을 위주로 얘기했는데, 카이스트 자살 사건이 한창 가시화되었을 때의 글을 읽고, 각자의 경험을 풀어놓는 시간이 있었다.

요즘에는 대학에서 자살 사건이 일어나도 크게 소란이 일지 않는 느낌이다. 내가 아는 교내 자살 사건만 해도 여럿 있는데 모두 묻혔다. 성적 때문에 장학금을 잘렸다 말하면 돌아오는 것은 비난 뿐이다. 나는 성적 장학금 때문에 휴학한 경험이 있다. 다들 무한경쟁사회에 익숙해져 가는 건가. 씁쓸하다.

무한경쟁사회는 결국 좋은 직장, 안정적인 직장을 구해야 하는 현실과 맞물리는 것만 같다. 조금만 경쟁에서 다른 궤도를 타도 바로 쓸데없는 경력 취급이니까. 그런 점이 슬펐던 것 같다. 아마 중학교 때 이런 이야기를 봤으면 좋은 학교 얘기를 했을 거다. 영원히 경쟁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야기를 다 나누고 보니, 왜 하필 ‘카이스트’였을까 싶다. 왜 카이스트에서 무한경쟁사회의 가시화가 시작되었을까. 명문대 사람들도 경쟁에 억눌려 지낸다는 사실에 어째서 사람들은 놀랄까. 추측하기로는 무한경쟁사회에서 ‘승리’한 사람들도 무한경쟁사회의 피해자라는 사실에 놀라는 게 아닐까 싶다.

명문대에서의 사회문제와 투쟁이 먼저 가시화되는 것은 확실히 씁쓸한 문제이다. 분명 경쟁사회에서 승리했다고 여겨지는 자들의 투쟁이기 때문에 조명하는 면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투쟁은 가짜가 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어떠한 사람도 무한경쟁사회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이와 떼놓지 못하는 담론이 하나 있다. SNS에서 대치키즈 플로우가 돈 적이 있다. 대치키즈들이 피해자성을 주장할때의 논점이 '무한경쟁사회'에 있는데도 계속해 ‘상위 계급’이라는 이유로 피해자성을 주장할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계급사회는 계급사회대로 규탄할 수 있고 무한경쟁사회는 그것대로 규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계급 비판과 신자유주의 비판을 동시에 할 수 있다. 대치키즈들이 특혜를 받았다는 것과 동시에 경쟁사회의 피해자임을 인정해야 한다. 동시에 다양한 사람들의 경쟁사회에 대해서도 들어봐야 한다. 마이크를 조금 더 넓게 쥐어주어야 한다. 장기적으로는 ‘명문대 학우의 자살 사건’이 아니라, ‘다양한 청년들이 느끼는 무한경쟁사회의 문제점’을 파헤쳐야 한다.

독서모임에서 다른 이야기를 훨씬 많이 했던 것 같은데, 느낀 점이 조금 다른 포인트인 것 같다. 혹시 얘기를 충분히 듣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있다. 다음번에는 독서모임에서도 메모하면서 이야기를 들어봐야겠다.

지역 여성회에서 빌린 책이다. 내 명의로 빌린 게 아니기에 후딱 읽어버렸다. 총 200페이지가 조금 넘는 간략한 책이다.

책을 읽기 전까지는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규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책에서 '종북 세력' 이라는 단어가 나오니까 생각이 조금 달라지더라.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국가보안법의 존재를 생각하니, 무조건적인 규제가 옳지만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표현의 자유는 본래 소수자들을 위한 것이기에, 그것을 제한하는 것이 근본적 해결책이 되지는 못한다는 게 책의 설명이었다. <말이 칼이 될 때>에서는 지지하는 규제가 필요하다고 한다. 예를 들어 모임에서 자체적으로 혐오표현을 금지하는 내규를 만든다든지, 교육 등에서 소수자들의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식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지지선언을 하고, 교육에서 혐오표현 근절을 위해 힘쓰는 방향성은 좋다고 생각한다.

사실 차별금지법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는 책이기도 했는데, 책이 2018년에 쓰인 걸 보고 너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2025년에도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지 않고 있다니. 말도 안 된다 정말로. 어서 국가인권위원회가 컨트롤타워 역할을 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지금 인권위 돌아가는 걸 보면 애초에 그러지 못할 것 같지만.)

혐오표현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한번 정립할 수 있는 책이었다. 혐오표현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 손에 들려주면 좋은 책일 것 같다.

다음 책 모임까지 <현시창>이랑 <부들부들 청년>을 주제로 발제를 해야 해서 준비 중이다. 일단 <현시창> 발제한 거를 컨펌받고 <부들부들 청년> 컨펌받으려고 한다. 내용 요약도 하고, 궁금한 점도 끼적여보고 신문기사 몇 개도 찾아봤다.

신문기사 찾은 거 몇 개 첨부하기.

[김지학의 세상다양] 청년 문제로 보는 사회문제 https://vop.co.kr/A00001641208.html

비수도권 청년들 빨아들인 일자리 ‘블랙홀’은?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54129

[청년을 위한 나라는 없다 ②] 불통의 청년 정치, ‘청년’에게 ‘청년 정치’를 묻다 https://inews.ewha.ac.kr/news/articleView.html?idxno=70636

찾으면서 느낀 것 중 하나가, 왜 사상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지 조금 알 것 같다는 점이다. 신자유주의 신자유주의 하는데, 정확히 신자유주의가 무엇인지 모르니까 발제가 넘 어렵더라. 그래서 조금 찾아보고 했다. 서마학 강의에도 나온다고 하니 일단 그건 그때 들을 예정.

그리고 정말 세상이 하나도 안 변했다. 이건 2013년 책인데, 12년이 지난 지금도 노조탄압은 계속되고 노동환경은 개선되지 않고, 경쟁과 차별은 계속되고 있으며 여성혐오 범죄는 디지털화되고 있다. 너무너무 답답한 상황이다. 심지어 이젠 이런 것들을 사회문제로도 보지 않는다. ‘청년들이 힘든 이유’를 개인의 탓으로, 호르몬의 탓으로 돌리고 있으니까.

여러모로 심란해졌다. 청년의 정치참여가 절실하게 필요하지만 쉽지 않은 상황이다. 사실 청년들만 청년 아젠다를 말해야 한다는 보장도 없다. 청년의 목소리를 대변해줄 사람이 임시적으로 필요하다는 생각도 한다.

.

다음은 발제를 위해 생각해 본 질문들.

1_ 책의 내용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무엇인가요? 그 이유는? 본인이나 주변의 경험 중 비슷한 사례가 있다면 이야기해봅시다.

2_ 책은 2013년에 쓰였고 그로부터 12년이 흘렀지만, 노동환경 개선과 경쟁사회, 여성혐오 문제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시: 청년정치의 부재, 계급 구조의 고착화, 정책의 연속성 부족, 언론의 무관심 등)

2-1_ 노동 문제와 관련해, 왜 노동자들의 노동환경은 좀처럼 개선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나요?

2-2_ 경쟁 사회의 맥락에서, 우리 사회의 경쟁이 불공정함에도 사람들이 공정하다고 착각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2-3_ 여성 성범죄 등 성차별 문제와 관련해, 최근 심각해진 백래시 현상을 어떻게 대응하고 해결할 수 있을지 의견을 나눠봅시다.

3_ 책 속에서 가장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낀 문제를 하나 골라, 우리가 상상해볼 수 있는 해결방안이나 정책 아이디어를 나눠봅시다.

#독후감

<부들부들 청년>을 대강 읽어보았다. 2016년에 쓰인 책이고, 다양한 청년과의 인터뷰를 통해 청년 문제의 현안을 분석하고 ‘청년법’을 제시한 책이다.

처음에 놀란 것이, ‘요즘 청년 힘들다’라는 인식이 당시에는 공고했다는 점이다. ‘이생망’ 같은 신조어가 청년의 좌절감을 상징하였다. 헬조선이라는 말도 흥하고, 미생 드라마가 유명했던 기억도 난다. 이 책에서는 청년의 3대 문제가 주거, 노동, 지역 격차라는 지적 또한 등장했다. 적어도 청년 현안에 대한 문제의식이 사회기류로 존재했다는 것이다.

한편 탄핵정국 이전의 청년에 대한 프레임을 되짚어보면 제일 먼저 MZ라는 말이 생각난다. 싹바가지 없는, 설렁설렁 하는, 의지 없고 예의 없는 신입사원의 모습. SNL에서 주현영 기자의 연기가 그 인식을 대표하는 것 같다. 탄핵 이후로부터는 ‘청년층의 극우화’가 심각하다는 쪽과 ‘2030 여성의 응원봉이 세상을 바꿨다’라는 쪽으로 나뉜다. 어느 쪽이든 청년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에 대한 해석은 없는 셈이다. 덧붙이면 ‘투표하지 않는 청년’이 어째서 투표하지 않게 되었는지도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다.

사실, 2016년에도 그러했지만 2025년에도 정치권이 청년들의 의제를 여실히 따라잡지 못한다는 느낌도 든다. 진보정당이 머물러있지 않고 청년들이 가져오는 의제를 잘 분석하였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왜 그 의제를 지지하는지, 그 속에 숨은 문제는 무엇이었을지 등.

그 중 대표적으로, 왜 요즘 진보 청년들은 차별금지법을 지지할까? 단순히 퀴어 의제가 부상해서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청년이 차별을 실감하였기에 차별금지법의 제정을 요구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모양은 이 책에 쓰인 ‘청년법’과 상당히 닮아있다. ‘청년은 나이, 성별, 성적 지향, 재산, 인종, 지역, 학력, 신체 조건 등에 의하여 어떠한 차별도 받지 않는다.’ 청년은 오랫동안 성별, 나이, 학력, 지역 등을 명분으로 한 사회에서의 차별을 실감하는 주체였다. 그렇기 때문에 차별받는 자들에게 연대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그렇더라도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제정을 대체하려는 명분으로 청년 현안을 내세우는 방향으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 그것이야말로 청년들을 바보로 아는 행동이다. 청년들이 왜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요구하는지 분명히 알고, 이와 연관지어 여성 청년, 대학 밖 청년, 지역 청년, 퀴어한 청년들의 이야기를 우선적으로 귀 기울여 듣고, 요구사항인 차별금지법 제정을 이루어내야 할 것이다.

이것 말고도 여러 생각들이 많이 들었을 텐데, 내가 아직 취직을 준비해본 적이 없어서 크게 공감하지 못한 것도 있다. 역시 당사자가 되어봐야 공감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 빠른 시일 내에 다시 한 번 읽으며 감상을 정리해봐야겠다.

2017년, 타이완 사법원은 동성 결혼을 허용하지 않는 현행 법제가 헌법상 혼인의 자유와 평등권을 침해한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2년 내로 입법이 이루어져야 하며, 불이행 시 민법상 동성혼이 자동으로 허용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반발한 보수 세력은 국민투표를 통해 민법 개정을 저지하고자 했으며, 자본과 미디어 자원을 활용해 여론을 주도했다. 그 결과 민법 개정은 무산되었으나, 별도의 특별법 제정을 통해 동성혼이 법적으로 인정되기에 이른다.

민주주의는 다수결이 아니다

저는 민주주의를 믿지 않았습니다. 주로 대학교 내 민주주의를 볼 때 회의감을 느끼고는 했습니다. 세습에 가까운 단일 선본이 출마해 선관위가 홍보를 뛰는 형태가 민주주의는 아니잖아요. 그러다가 비상계엄이 있고 나서 학생총회가 성공했을 때, 윤석열 탄핵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보았을 때 민주주의의 정상 작동을 보았습니다. 민주주의자라는 용어가 어색하지만, 어디 가서 물어보면 나는 민주주의자라고 말하고 다녔어요. 그런데 오늘 이 책을 보고 생각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인권을 다수결에 부치는 것도 민주주의로 인정받을 수 있다면, 정말 민주주의자로써 부끄러워질 것 같아요.

타이완의 보수 세력은 민법상의 동성혼 법제화를 저지하기 위해 국민투표에 찬반을 부치게 됩니다. 사법원이 헌법상 평등권의 영역이라고 판단했는데도 말입니다. 다수결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닙니다. 다수결이라 해도, 그것이 소수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순간 정당성을 잃습니다. 소수 의견 존중의 원칙까지 갈 필요도 없고, 그냥 존중해야 합니다. 그렇게 민주주의적으로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고 정했으니까요. 그리고 만일 존재의 찬반표결이 정당한 것처럼 국민투표에 부치게 되면 자본력이 많은 쪽이 이길 확률이 높은 것이 당연합니다.

존재를 표결에 부치는,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에 대해 정말 화가 많이 났습니다. 그래도 특별법으로라도 동성혼이 법제화되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저는 민주주의를 앞으로 믿어도 되는 걸까요. 사실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민주주의 체제 아래서 투쟁해야겠죠.

우리 예수님 그렇게 꽉 막힌 분 아닙니다

저는 모태신앙이지만 지금은 교회를 다니지 않아요. 고등학교 때 어떤 친구가 본인은 디즈니가 싫다며, 동성애를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거든요. 보수 세력은 미국이라면 뭐든 좋아할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그때부터 교회를 거의 나가지도 않았고, 종교를 믿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책에서 장마오전 목사가 “기독교가 믿는 건 성경만이 아닙니다. 예수도 믿죠.” 라고 말했을 때는 그 의미를 깊게 알 수 있었습니다. 성경을 왜곡 해석한 반동성애를 이데올로기로 삼아, 동성애를 반대해야 한다고 말하는 걸 예수가 좋아할까요?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인권의식이 괜찮은 목사가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은 응답하라

읽으면서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제정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타이완의 민진당이 더불어민주당보다는 더 진보적인 것 같았거든요. 중도보수라고 선언한 더불어민주당은 기독교인들의 눈치를 많이 보는 것 같아요. 정치에 대해 무지한 편이라 쉽게 말하기 어렵지만, 고작 차금법에 정치권이 이렇게 반응한다면 갈 길은 멀고 험한 것 같습니다. 마땅한 권리조차 스스로 싸워서 쟁취해야 하는 세상에서 투쟁입니다 투쟁.

마무리

제가 책을 감상하는 기준이 유해서 매번 좋은 책이라고 말하지만, 이건 정말 최고로 좋은 책입니다. 아시아에서 최초로 동성혼을 법제화한 나라 타이완의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700번도 넘는 회의를 거친 활동가들의 이야기, 보수 정당에서 동성혼 법제화에 힘쓴 국회의원의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그렇다면 지금 이 책을 읽어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독후감

인생 두 번째 서퀴인데 부스러가 되었다. 부스 안쪽이 훨씬 더운데도 처박혀있는 것이 나았다. 밖은 인파로 넘치고 굿즈 영업 소리가 째질 듯이 들렸다. 사람이 무서울 시기는 지났지만 어쨌든 바글거리는 서울에 적응 안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문득 상대적으로 한적하던 대전 퀴퍼가 떠올라 더 움츠러들었다. 아, 난 서울이 너무 힘들다. 정말 힘들다.

.

솔직히 저 한 문단이 서퀴의 모든 것을 설명해주기는 한다. 그래도 후기를 쓰려고 마음먹은 이상, 인파 타령만 하고 있을 수는 없으니 머릿속에 담아놓은 걸 얘기해야겠다.

자본주의 퀴퍼에 대해 한번 얘기해보고 싶다. 서퀴에 가면 온갖 후원리워드를 파는 부스들이 많다. 간혹 대기업이 참여하는 경우도 흔하다. 퀴퍼의 자본화가 우려된다는 말도 상당할 정도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나뉘는 것 같다. 하나는, 축제가 시장바닥이 되어 운동성을 잃어간다는 것. 하나는 대형 자본의 개입으로 퀴퍼의 본질이 손상되는 것.

후원리워드에 대해 해명을 하자면, 소규모 퀴어 운동 단체들은 대부분 돈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대부분의 퀴어 단체들은 후원과 기금으로 굴러간다. 서울퀴퍼는 가장 많은 사람이 오는 퀴퍼이며 후원금을 쌓기 가장 좋은 장소이다. 어쩔 수 없다. 굿즈를 팔아서 후원금을 쌓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멸종할지도 모르니까. 더러운 세상에서는 돈이 있어야 운동도 할 수 있다. 기왕이면 단체들이 지속성을 가질 수 있게 도와주면 좋겠다.

후자에 대해 설명해보겠다. 간혹 유럽이나 미국처럼 한국의 퀴퍼가 기업과 상업화로 변질될까 우려하는 시선들이 눈에 띈다. 기업 로고에 무지개를 입히고 퀴어 상품들을 판매하지만, 정작 인권 개선에는 소극적인 그런 퀴퍼. 거대 자본기업의 핑크워싱이 판치는 것은 정말로 원치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퀴퍼'에 대한 '불매' 운동으로 번질까 걱정이 된다. 결국 대응 방식이 소비자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일 퀴퍼의 자본화가 걱정된다면, 직접 참여로 퀴퍼의 운동성을 확장시키는 것이 어떨까 싶다. 교차적인 의제에 대한 몸자보를 입고 간다든지, 행진에 직접 만든 피켓을 들고 나선다든지, 혹은 조직위에 뛰어든다든지.

아무튼 모쪼록 대한민국의 퀴퍼가 운동성을 잃지 않았으면 한다. 퀴퍼가 안전하고 예쁜 공간으로만 남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건 또 다른 이야기지만, '퀴어퍼레이드' 하면 자동으로 서울만을 연상시키는 경우가 많다. 서퀴를 아예 퀴퍼라고 줄여 부르는 경우도 많다. 사람들이 지역의 퀴어퍼레이드에도 신경을 많이 써줬으면 좋겠다. 지방에도 많이 놀러와주세요. 여기에도 퀴어 살아요.

.

서울퀴퍼에서 받은 스티커들을 정리하고, 후기를 쓰려고 하니까 있는 사진이 거의 없더라. 사람 얼굴이 안 나오게 사진을 찍으려다 보니까, 유일한 사진이 진보당 현수막밖에 없다. 다음 서퀴 전에는 발의가 되어서 통과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원내정당이니까 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투쟁.

#에세이 #일기

퀴어 운동을 하다 보면 가끔 친구들이 질문을 합니다. 자신은 2D 캐릭터를 사랑하는데 왜 성소수자로 인정받지 못하냐고요. 솔직히 처음에는 혐오자들의 레파토리인 줄 알았는데, 더 이야기해보니 순수하게 궁금해하고 있더라고요. 저는 퀴어라는 것은 사회의 패러다임 속에서 형성된다고 말했습니다. 모든 사랑은 기본적으로 퀴어하나 사회에서는 2D 캐릭터를 향한 사랑을 성소수자라고 부르지 않는다고요. 그러자 돌아온 대답은 이것이었습니다. 본질적으로 정체성 정치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이 대답은 ‘정체성 정치는 나쁜 것’이라는 가정이 깔린 질문이었습니다. 정체성 정치에는 분명히 위험한 면이 있습니다. 당사자와 비당사자를 가르고, 결국에는 ‘당사자’들만 살아남는 구조이죠. 탈락한 당사자들은 당사자성을 인정받지 못합니다. 제일 대표적인 예시가 디지털 래디컬 페미니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성의 범위를 줄이고 축소시켜 기혼자 여성, 트랜스여성, 퀴어 여성들의 연대를 수락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쁜 예시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체성 정치에 강력한 점 또한 있습니다. 강한 단결을 만들어 사회적 가시화를 이루어내는 것 말입니다. 대표적으로 나는 퀴어이다, 나는 퀴어인 것이 자랑스럽다, 라고 외치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기 위해서라면 정체성이 본질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나는 태어나기를 레즈비언으로 태어났다, 와 같은 것이죠. 그래야 고정된 정체성이 타협 불가능한 본질임을 강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전환치료는 무용지물이자 폭력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이때, 정체성이 고정되어있다는 말은 퀴어 이론과는 어긋나 보입니다. 정체성이란 것은 사회의 패러다임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인데, 정체성 정치는 본질주의를 추구하니까요. 그러나 ‘실제로 그런 것’과 ‘그렇게 말하는 것’은 다릅니다. 다시 말해 전략적으로 본질주의를 이용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퀴어 이론을 이해할 수 없고, 이해를 강요해서도 안 되기 때문입니다.

퀴어 운동에서의 정체성 정치가 유효한 것과 별개로, 위험한 점이 많습니다. ‘진짜 퀴어’가 아니라고 배제당하는 퀴어들이죠. 예를 들어 무성애자가 받는 억압이 가짜라고 주장하거나, 이성을 사귀는 바이섹슈얼들에게 사실은 이성애자 아니었냐고 묻는 등의 일입니다. 정체성 정치를 무기로 쓰려면, 그 무기가 본인을 찌르지 않는지 보아야 합니다. 퀴어 운동을 위해서라면 끊임없이 방향성을 성찰하고 퀴어 커뮤니티 내부에서의 흐름을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비당사자의 배척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디지털 래디컬 페미니즘은 자주 남성의 여성의제 연대를 거부하고는 합니다. 이것 또한 정체성 정치의 어두운 면입니다. 그렇다면 퀴어 운동의 정체성 정치에서도 유사한 경험이 있지 않을까요? 퀴어는 아니지만 연대하고 싶은 사람은 정체성 정치의 현장에서 어디로 가야 할까요? 그럴 때 앨라이라는 이름이 빛을 발한다고 생각합니다. 연대자들에게도 정체성을 부여함으로서 일종의 ‘같은 편’으로 포섭하고, 연대자에게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환대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연대자가 의제에서 ‘비당사자’로 남지 않게 되죠.

정체성 정치에는 분명 위험이 따릅니다. 배제의 논리로 작동하는 일이 부지기수입니다. 하지만 정체성 정치는 외부로 내보일 때 강력하고, 가끔은 이 정치적 언어를 계속 사용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끊임없이 커뮤니티 내부를 점검하고, ‘앨라이’라는 연대자로서의 정체성을 부여해 타인을 환대해줄 수 있다면, 퀴어 운동이 조금은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에세이

“지하철이 안 오는 것 같지 않냐.” 장애인영화제에 난입한 모 밴드의 혐오적 발언 중 하나이다. 전장연이 출근길 지하철 탑승 시위를 벌여 탑승이 지연된 건에 대한 것이다. 그들은 '탑승이 시위가 된다'는 문장에서 모순점을 찾아내지 못하고, 경찰이 오기 전까지 막무가내로 공연을 이어갔다고 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퀴어 퍼레이드에 대한 근거 없는 소문도 말했다는 점이다. 퀴어한 장애인, 장애를 가진 퀴어들에 대한 인식이 있었던 걸까.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듯이, 이들은 혐오를 교차적으로 행함으로써 인권이 교차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근거를 주었다.

이 책은 장애인과 장애 인권에 대한 에세이 30여 편을 엮은 책이다. 책을 읽으면 장애와 인종차별, 성소수자 인권, 성적 자기결정권 등이 어떻게 교차적으로 작용하는지에 대해 알 수 있다. 또한 '이것도 장애였다고?' 싶은 것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이는 장애가 하나의 정의로 수렴되지 않음을 뒷받침한다. 장애와 연관된 의제는 수도 없이 많으며, 이 책은 저자들의 경험을 통해 그 내용을 하나씩 소개하고 있다.

책을 읽으며, 미국에 거주하는 흑인 중 20%가 장애인이라는 사실에 놀랐다. 장애인권도 역시 가시화의 문제인가. 관련해서 어떤 후배가 특이한 주장을 한 적이 있었다. 학교에 장애인이 보이지 않으니 특혜를 줄 이유가 없다고.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장애인이 없을 리 없다. 보이지 않는다면 왜 보이지 않는지를 생각해야 타당하다. 그리고 장애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더욱 드러나게 가시화해야 한다. 또 첨언하자면 대부분의 '특혜'들은 어퍼머티브 액션조차 되지 않는, 인간으로써 누려야 할 권리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어딜 가더라도 장애인권의 신장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사실 책을 읽으며 스스로가 혐오발언을 하고 살았다는 점에 놀라기도 했다. 이런 장애인의 경험담을 담은 책이 더 많이 출판되고 널리 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현재 미국 정권은 트럼프가 쥐고 있다. 트럼프 정권 아래에서 이 책처럼 진보적인 프로젝트가 다시 이루어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국내에서도 이런 독자적인 프로젝트가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독후감

어쩌다 보니 독서모임에서 읽게 된 책. 작가나 책에 대한 정보 없이 본문만 읽었다. 사람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건 사람이다, 사람은 욕망에 따라 움직인다, 그런 내용을 담고 싶었던 걸까 생각했다. 심지어 초반 부분을 읽었을 때는 억압된 여성의 욕망과 그 분출과 관련된 내용인 줄 알았다. 그런데 찾아보니 자연주의 소설이라고 해서 따로 분류가 되어 있었다.

자연주의 소설이 어떤 것이고 하니, 낭만주의에 반대되는 문학사조라고 한다. 환경이나 유전 같은 것들을 '과학적으로' 설명한 문학을 뜻한다고 한다. 예를 들어, 애정 없는 결혼, 음침한 공간, 병약한 남편이 테레즈의 신경질적이고 조용한 성격을 만든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테레즈와 로랑 사이의 관계는 사랑보다는 육체적 충동을 강조하고 있다. 이들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것은 초자연적인 존재의 개입이 아닌 그들의 업보인 것이다.

문학사조나 고전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이러한 자연주의가 인간의 잔혹성을 묘사하게 되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흐름 같다. 그러나, 이런 소설들을 읽을 때는 세상이 생각보다 과학적이지 않다는 점을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좋은 환경에서도 아픈 아이가 자랄 수 있는 것처럼. 자연주의가 인간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일지 몰라도, 실제 인간은 그렇게까지 단순하지 않다고 믿고 싶다.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