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받지 않을 권리
*이 글은 정신질환 진단 경험에 대한 비판적 자기서사입니다. 과거 병원이나 병동에서의 강제 조치, 자해행동 등에 대한 서술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진단은 일종의 프레이밍이다. 의사와 상담사는 상당히 논리적인 근거를 들어, 모든 행동에 이유를 부여한다. 이 사람이 하루종일 글을 쓴 건 조증 때문이야. 저 사람이 집중을 못하는 건 ADHD나 우울증 둘 중 하나 때문일 거야. 이 글에서 말하고 싶은 경우는 본인이 자신의 병명을 정체성으로 갖는 경우가 아니다. 본인이 미쳤다는 것을 정체성으로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고, 나도 그러하다. 다만 나는 타인이 나에게 부여한 프레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언젠가 DBT(변증법적 행동치료)를 잠깐 받은 적이 있다. 들어가기 전 제일 먼저 했던 일은 MSD 매뉴얼을 상담사와 함께 읽어보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경계선 인격장애라고 ‘진단’ 받았고, 매뉴얼은 나의 성격을 꿰뚫어보려는 듯이 조목조목 분석하고 있었다. 버려짐에 대한 병적인 두려움, 분노, 쉽게 변함, 충동적 행동 및 자기파괴적 행동. 맞는 것도 있고 틀린 것도 있었다. 버려지는 게 두려웠지만 화를 내는 편은 아니었다. 충동적 행동들은 ADHD와 양극성 장애라는 또다른 프레임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인격장애라는 것이 사람의 인격을 병으로 규정하는 것이니만큼, 나는 그 이후로부터 나의 성격에 진지하게 ‘병’이 있다고 믿었다. (이때 결함이 있는 성격을 인식하는 것과 그것을 무조건적으로 병리화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임을 짚고 넘어가고 싶다.)
진지하게 인격장애라는 것에 대해 의구심을 품은 건 꽤 최근에서이다. 우연히 퀴어 서적을 다룬 서점에 갔다가 매드 운동을 접하고, 광기학의 존재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짧게 말하면, 정신질환으로 낙인찍힌 미친(Mad) 사람들의 자율성과 권리를 외치며, 정신의학적 치료와 통제에 저항하는 사회운동이다. 그제야 나는 나의 많은 부분이 ‘인격장애’라는 프레임에 가두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예를 들어, 경계선 인격장애 환자들은 본인의 정체성이 불확실하고 자주 바뀌는 편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것 때문에 나는 그동안의 ‘정체화’ 경험들을 모두 병적인 행동으로 인식했고, 나의 정체성을 언어화하려는 것 자체를 거부하게 되었다. 그 정체성에 변동이 생기면 경계선 인격장애의 프레임으로 모든 게 설명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글을 쓰는 것 자체도 프레이밍이 가능하다. 경계선 인격장애 환자들은 본인이 아프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경계선 인격장애를 ‘완화’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알려져 있다. 하나는 DBT로 자해나 자살 경향성을 줄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이를 먹는 것이다. 이 방법들을 들여다보며 뒤늦게 깨닫는 부분이 있다. 약을 먹는다고 치료되는 것도 아닌데 왜 약을 복용하고 있을까. 그렇다면 처방받지 않을 권리가 필요한데, 어째서 상담사는 처방을 강요하는 걸까. 혹은 자해 행동이 어째서 강제 입원의 사유가 되는 것일까. 그것으로 인해 본인이 고통받고 있다면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병동 앞에 놓여져 있던 진정서를 기억한다. 입원 과정에서 본인의 인권이 침해당했을 때 진정서를 써서 넣으면 되는데, 나는 ‘자해 위험’이 있다며 볼펜조차 받지 못했다. 강제된 약물 복용은 병동 내에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과거의 경험을 되살리며, 나는 매드 운동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언뜻 보면 아픈 사람이 치료받는 것인데 왜 인권 운동이 필요한지 모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신의학과 정신건강 제도의 폭력성, 정신질환이 주는 낙인을 고려해봤을 때 운동은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강조하지만 나는 지금 병식이 없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미쳤다는 것을 긍정하려는 것이다. 다만 이것이 경계선 인격장애라는 프레임을 외부에서 씌우는 형태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나에게는 진단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 병명을 기록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